자식이라면 누구나 부모상을 당했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기별을 한다. 그런데 사적으로 기별하지 않고 부음을 광고로 알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명망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보통사람들 집안에서는 그렇게 널리 알릴 만한 명성도 없거니와 무척 비싸게 먹히는 부고 광고료를 감당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윤씨상가(윤치호)의 부고 광고(매일신보 1911년 9월 26일)에서 요즘 부고광고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다. “남작(男爵) 웅렬 씨가 숙환으로 본월 22일 하오 8시에 별세하셨기로 자이(玆以·이에) 부고함. 명치 44년 9월 22일. 사자(嗣子) 윤치호 (중략)” “재고(再告) 본월 29일 상오 8시에 신문 내 예배당에셔 장례를 거행하고 동일 상오 10시 남문역 열차로 온양읍 묘지로 발향(發向·출발)하야 동월 30일 정오에 하관식을 거행함.”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은 대원군에 의해 발탁되어 군부대신을 지냈으며 일본 왕실로부터 남작 칭호를 받았다. 국가원수급도 아닌데 9일장은 좀 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장은 법정 최고기간인 9일장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은 6일장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부고 광고는 망자보다 그 자식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윤치호(1865∼1945년)가 누구인가. 여기에서, 인생 후반기에 이토 지고(伊東致昊)로 살았던 그의 친일 행적을 굳이 들추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가 60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대부분을 영어로 쓴 ‘윤치호 일기’를 남긴 한 시대의 풍운아이자 고뇌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점은 기억하고자 한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부고에는 지금처럼 가족 상황, 발인 일시, 장지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개화기 무렵부터 지금의 부고 형식이 굳어진 듯. 우리나라의 부고는 이 광고에서처럼 자식들 이름 위주로 나열하는 형식이다. 영미 문화권의 부고에서 고인의 인생 이력이나 어록을 남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우리와 문화가 다르기는 하지만 자식이 아닌 고인 위주로 서술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또한 집안의 대를 이을 장자의 뜻인 사자(嗣子)라는 말을 윤치호의 이름 위에 썼고 지금도 그렇게들 쓰고 있는데, 이 용어의 사용도 자제했으면 싶다. 우리 시대에는 아들 위주의 대물림이 꼭 미덕이라고만은 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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