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이형삼]부산 美문화원 방화사건 주도 김현장 씨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6월 4일 03시 00분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31세였던 김현장 씨는 환갑을 넘긴 초로(初老)의 모습이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의자에 오래 앉아 있기가 불편한 듯
 인터뷰 도중 자주 자리를 떴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31세였던 김현장 씨는 환갑을 넘긴 초로(初老)의 모습이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의자에 오래 앉아 있기가 불편한 듯 인터뷰 도중 자주 자리를 떴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경 부산 중구 대청동 미국문화원이 폭발음과 함께 불길에 휩싸였다. 그 시간 미국문화원 부근의 유나백화점 6층, 국도극장 3층에선 유인물이 뿌려졌다.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파쇼정권을 타도하자’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물러가라’…. 당시로선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불은 1시간 만에 진화됐으나 도서실에 있던 동아대 학생 1명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했다.

3월 말 몇몇 공범이 체포된 데 이어 사건 14일 만인 4월 1일 주범인 고신대 학생 문부식 김은숙 씨가 함세웅 신부의 권유로 자수했다. 이튿날 이들의 ‘의식화 멘토’인 김현장 씨도 자수했다. 김 씨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그 참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배포하다 수배돼 천주교 원주교구청에 2년 가까이 숨어 있었다. 사흘 뒤에는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가 범인은닉 혐의로 체포되면서 정권과 천주교가 대결 국면에 들어섰다. 사건 관련자 16명 중 김현장 문부식 씨는 사형, 나머지는 무기징역과 징역 3∼15년을 선고받았다. 김현장 씨와 문부식 씨는 1988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운동권에서 1980년대 반미투쟁의 효시로 자리매김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3월 18일은 아무런 ‘이벤트’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잊혀져 가던 부미방의 기억을 되살리게 한 것은 김 씨가 지난달 14일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18번 후보 강종헌 씨에게 보낸 공개서한이었다. 김 씨는 강 씨가 간첩임을 확신하면서 “모든 행동을 멈추고 너의 조국으로 돌아가기 바란다”고 썼다. 61세, 초로(初老)에 접어든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홀연 자신을 드러낸 까닭이 뭘까. 그것도 부미방과 아무 상관없는 화두를 들고.

“얼마 전부터 통합진보당 젊은 친구들 행태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애국가도 안 부르고 국민의례를 혁명동지들에 대한 추도 묵념으로 대신하고 평양방송 어투를 그대로 따라한다.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는 우리 사회를 ‘진보’시키려면 운동의 내용과 과제가 달라져야 하는데…. 그러던 중 통진당 비례대표 명단을 보니 ‘강종헌’이 있었다. 동명이인이겠지 했는데 내가 아는 그 강종헌이 맞더라. 기겁을 했다. 그는 북한 노동당 지도위원이다. 지도위원은 누구나 그 앞에서 입당할 수 있을 만큼 북한에서 막강한 존재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강 씨는 대전교도소와 대구교도소에서 김 씨와 수년 동안 함께 복역했고 1988년 같이 석방된 인연이 있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 사건이 조작됐다고 결론을 내리자 강 씨는 올해 초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나.

“학생이 노동당원이라니, 처음엔 나도 조작된 사건이려니 했다. 그런데 종헌이가 제 입으로 다 얘기했다. 고교생 때 기타 연주를 좋아해 김일성 생일이면 찬양가를 만들어 북한에 보냈다, 공작선을 타고 북에 들어가 밀봉교육을 받았다, 캄보디아 시아누크 공(公) 방북 축하연 때 20m 거리에서 김일성 주석을 봤다, 자신은 노동당원이고 범민련 활동을 하며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1심 때는 법정을 선전장으로 활용하려고 사실대로 인정했지만 2심에선 전략을 바꿔 고문에 의한 조작이며 밀봉교육 시점엔 일본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제시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채널A 영상] 김현장 “강종헌이 떳떳했다면 왜…”

―밀봉교육을 받았다는 사람이 그렇게 속속들이 털어놨다니 믿기지 않는다.

“부미방이 터졌을 때 김일성이 ‘나의 보천보 항일투쟁보다 더 영웅적’이라며 치켜세웠다고 한다. 북한 전역에서 부미방을 기리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일성이 내게 영웅 칭호를 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에 대한 종헌이의 보안의식이 희박했을 거다. 나 또한 종헌이의 다재다능함과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에 매료돼 많이 의지하고 지냈다. 하지만 그와 나는 조국이 달랐다. 내가 ‘정권 도둑’이라면 그는 ‘나라 도둑’이었다.”

―그걸 알리려고 나선 건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데 북한 노동당원들이, 이미 실패한 이념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찬 그들이 대한민국 국회의 아랫목을 차지하겠다는 건가. 지난 총선을 앞두고 그런 자들과 ‘선거연대’도 아닌 ‘정책연대’를 하겠다고 나선 민주당은 또 뭔가. 더는 입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김 씨는 석방된 지 6개월 만인 1989년 5월 다시 구속됐다. 전국민족민주연합 국제협력위원장으로 있을 때 해외 통일단체에 ‘신문기사 수준’의 자료를 팩스로 보낸 것이 국가보안법의 국가기밀누설죄에 해당됐다. 징역 7년을 선고받고 4년 가까이 복역하다 1992년에야 바깥세상에 나왔다.

―솔직히 당신도 용공(容共)인 줄 알았다. 두 번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으니까.

“용공이라서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른 게 아니라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러서 용공이 됐다. 우린 공산주의 구호를 외친 적도, 공산주의 사회를 동경한 적도 없다. 미국이 1980년 봄 한국의 민주화 열기를 외면하고 한국군 작전권을 전두환에게 넘겨 광주의 비극을 낳았다는 것에 분노했을 뿐이다. 광주항쟁 직후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은 ‘한국인은 들쥐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따를 것이며 한국 국민에겐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못된 시어미’ 같은 미국의 버릇을 잡지 못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요원할 것 같았다.”

―부미방의 역사적 의미를 따져 본다면….

“부미방 이전의 운동권엔 ‘반미’가 없었다. 부미방은 선명한 반미투쟁으로 미국에 강렬한 메시지를 줬다. ‘양키 고홈’ 구호가 없는 고분고분한 한국에서 대학생, 그것도 기독교를 공부하는 신학대생들이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으니 미국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나. 수평관계가 아니라 상하관계였던 한미관계가 부미방을 계기로 바로잡히기 시작했다고 본다. 또한 광주 탄압으로 민주화의 싹이 잘려나간 그 시기에 운동가들로 하여금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물꼬를 텄다. 그 결과 우리 민중운동의 역사를 얼마간 앞당겼고 그 연장선 위에서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이 촉매가 되어 ‘1987년 체제’를 불러왔다.”

부미방 관련자들이 수사받고 있을 때 천주교를 중심으로 종교인들의 성명서가 잇따라 발표됐다. 그중에서도 1982년 4월 15일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등이 함께 낸 교회사회선교협의회 성명서는 미국의 5·18민주화운동 진압 용인, 위컴 사령관 등의 한국 비하 발언, 불평등한 한미관계 등을 부미방 사건의 배경으로 제시해 전두환 정권에 큰 부담을 안겼다.

당초 김 씨는 주한 미군기지에 대한 화염병 공격, 국내 미국인 집단거주지역 점거 등을 구상했으나 현실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미국문화원 방화를 택한 것은 인명 피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문화원은 한국에 미국 정치문화의 우월성을 홍보하는 공간이라 방화에 따른 선전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했다. 불을 지른다는 게 꺼림칙했지만 그 정도의 극렬한 방법이 아니면 투쟁 목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다. 부미방 사건의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다.

“행여 사람이 다칠까 싶어 사건 한 달 전에 사전답사를 했다. 도서실에 있는 사람들이 불났을 때 피신할 수 있는 비상구를 확인했다. 건물 내부 구조와 인화물질 유무도 꼼꼼하게 살폈다. 점심시간 직후 도서실에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그 시간에 거사하기로 했다. 그랬는데…. 그 일(대학생 사망)은 사건 관련자 모두의 가슴에 평생 응어리로 남아 있다.”

―당시 품고 있던 적대적인 미국관(觀)은 이후 어떻게 변했나.

“나의 반미는 미국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라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는 미국의 그릇된 외교정책에 반대한 것이다. 요즘 불거져 나오는 극단적, 반사적 반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의 반미운동을 계승한 후배들이 이걸 주체사상과 결합하면서 너무 멀리 가버렸다. ‘미국’만 들어가면 무조건 반대하는 그들의 오류에 대해 책임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논란을 예로 들었다.

“무역의존도(GDP 대비 무역액 비율)가 97%에 이르는 우리 경제가 외국과 비즈니스를 안 하면 몇 달이나 버티겠나. 세계 최대시장인 미국에 수출하지 않고 한우 키우고 농사만 지으며 살 수 있나. 우리도 무역으로 이익을 내야 하고 상대국도 자국민을 챙겨야 하니 모든 게 우리한테만 유리할 순 없다. 이런 현실에서 유불리를 따져 협상을 하자는 건데 무작정 반대만 하면 어쩌자는 건가.”

―부미방 때 뿌린 유인물엔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경제수탈을 위한 것으로 일관돼 왔다’는 대목이 있던데….

“아, 그거야 그냥 하는 소리지…(웃음). 제3세계 경제론이 한창 유행하던 때라 그냥 한 줄 집어넣었던 거다. 지금 세상에 미국 경제와 관계하지 않고서 어떻게 살아가나.”

―1980년대 운동권 의식화의 원조 격인데도 출감 이후 후배 운동가들과 단절된 삶을 살아온 듯하다.

“주체사상을 처음 접한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초근목피 뜯어먹던 항일 빨치산 시절에나 먹힐 얘기였다. 북한이 1960년대만 해도 우리보다 앞섰지만 1980년대엔 외환보유액이 남한의 중소기업 수준이었다. 어떻게 남한에서 주체사상으로 혁명을 하나. 그런데도 석방되고 1993년 광주에 갔더니 대학가가 온통 ‘주사파 판’이더라. 대학가 5월 행사에 초청받은 재야 인사들이 주사파 남총련(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이 써준 성명서를 그대로 읽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가 ‘주체는 아니다’라며 정색을 하고 입바른 소리를 했으니….”

“운동은 도제(徒弟)적 계승이 아니라 비판적 계승이라야 한다. 나를 거름으로 삼아라. 너희들은 선배들보다 더 건설적이고 발전적이어야 한다”라는 그의 호소는 ‘변절’이라는 메아리로 돌아왔다. 대학가를 떠난 그는 5·18기념재단 출범, 광주항쟁 관련 단체 통합, 5·18 묘역 조성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 운동가의 본보기가 되겠다며 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다.

“나와 얽히는 바람에 고생한 사람이 이래저래 80명이 넘는다. 그 가운데 복학생이 있으면 한 학기 등록금이라도 쥐여주려고 했다. 내가 수배 중일 때 현상금이 1억 원이었다. 피신해 있던 원주교구청 코앞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그때 한 달에 4만∼5만 원 받으며 잡일 하던 교구청 아저씨 아주머니들 중 누구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그분들 은혜도 잊을 수 없었다.”

한때 잘나가던 사업은 수명이 길지 못했고 최근엔 또 다른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종교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그에게 좀 부담스러울 수 있는 질문을 마지막으로 던졌다.

―일부 종교인이 4대강사업, 한미 FTA, 제주 해군기지 같은 정부 정책에 줄곧 반대하고 나서는 것은 어떻게 보나.

“안타깝다. 종교인들이 어두운 시절에 횃불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난세가 아니라 치세다. 우리가 요구했던 모든 제도가 이뤄졌거나 이뤄지고 있는데 왜 저러는 건지…. 과거의 열정적 사회참여 활동으로 인한 관성 때문일까.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가 그런 정책을 내놨어도 저렇게 반대했을까.”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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