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스페인의 유럽 재정위기가 한국의 금융시장을 또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2,000 선에서 등락하던 주가는 어느새 1,700 선 후반에 와 있고, 꾸준히 1100원대 초반을 유지하던 환율은 1100원대 후반에 있다. 유럽 문제의 향방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난무하고, 향후 한국의 금융시장과 경제의 향방에 대한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의 외환위기는 차치하고라도 글로벌 금융위기와 미국, 유럽의 재정위기를 거치는 동안 해외 주요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국의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은 불안을 겪어 왔다. 큰 충격인 경우 국제투자자들은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충분한지 의심했고, 우리는 위기에 대비해 충분한 달러를 준비하려고 해왔다. 이런 노력이 우리로서는 상당히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한국이 아닌 미국 부동산시장에서 시작된 일이고, 재정위기는 한국이 아닌 미국과 유럽의 재정 문제인데 왜 한국의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는지? 왜 한국은 미국과 유럽에 문제가 생길 것에 대비해 준비를 해야 하는지? 그것도 한국 돈이 아닌 미국 달러를 준비해야 하는지? 美-유럽 위기 때마다 금융시장 출렁
넓게 보면 이런 현상은 국제통화체제와 관련이 있다. 국제통화체제는 국가 간의 거래 시 발생하는 다양한 정책, 규칙, 제도를 의미하고 통화 태환성, 국제 자본 이동, 환율제도, 국제 유동성 공급 등에 대한 규칙 및 국제기구, 통화 감시 및 협조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현 국제통화체제의 특징은 모든 국가가 환율제도와 자본 통제정책 등에 대해 획일적인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각국이 대내 균형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한 후 대외 균형은 자동적으로 조정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국제적 공조와 국제기구의 역할이 축소된 형태다. 이런 의미에서 무체제(non-system) 혹은 혼합형 체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국경 간 거래의 상당 부분이 달러화로 이루어지는 점에서 미 달러화 중심체제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 현 국제통화체제가 출범할 당시에는 문제점들을 인식하지 못했으나 점차 국제경제 환경이 변화하면서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 체제 출범 시 선진국들은 자유로운 국제 자본 이동을 허락한 반면 개발도상국들은 국제 자본 이동을 제약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하지만 자유로운 국제 자본 이동하에서 선진국들은 지속적으로 발전했고, 한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본시장을 개방하게 됐다. 이후 국제 자본 이동이 증가함에 따라 국제결제통화인 미 달러화의 필요성이 증가했고, 특히 국제 자본의 급격한 유출로 달러화가 부족하게 되는 경우 개발도상국들이 외환위기나 경제위기를 경험하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한편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의 급속한 성장으로 이들 국가의 경제규모는 선진국의 경제규모를 추월하게 됐다. 결국 신흥국과 개도국들의 미 달러화에 대한 결제 수요와 외환보유액 같은 예비적 수요가 폭증하게 됐고 글로벌 불균형(미국을 포함한 경상수지 적자국의 적자와 중국 일본을 포함한 경상수지 흑자국의 흑자가 지속되는 현상), 환율 이탈(환율이 적정 수준에서 벗어나 잘 돌아오지 않는 현상) 등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한국은 이런 국제 환경의 변화에 비교적 잘 적응하는 편이다. 외환보유액 축적, 각국 중앙은행들과의 달러 스와프 협정 체결,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금융 협력, 글로벌 금융 안전망 제안 등을 통해 유사시 충분한 달러를 준비하려는 노력을 해왔고, 거시건전성 규제 등을 통해 국제 자본 이동 관리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노력들이 금융시장 혼란의 정도와 경제위기 발생 가능성을 낮추었다는 면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차선책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은 국제통화체제 자체의 변화다.
국제통화체제는 영원하지 않다. 20세기 초 금본위제도의 문제점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달러화 중심의 고정환율제도인 브레턴우즈 체제가 나타났고, 브레턴우즈 체제의 문제점으로 인해 현 국제통화체제가 출범했다. 이런 기존 국제통화체제의 변화는 주요 선진국들의 합의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최근 신흥국의 부상으로 선진국들도 선진국들만의 합의로 국제통화체제를 포함한 세계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했고, 실제로 국제적인 논의에서 한국과 다른 신흥국들이 포함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국제통화체제 변화 위해 노력해야
한국은 이런 모멘텀을 지속해 신흥국들의 리더로서 신흥국들의 입장을 조정, 규합하고 신흥국들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된 국제통화체제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은 세계 경제에서 높아진 위상을 적절히 활용하고, 향후 더 높은 위상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런 과제가 전통적으로 소국이었던 한국에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목표를 세워 지속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언제까지 평소에는 쓸 수 없는 미 달러화를 곳간에 쌓아놓고도 불안 속에 살아가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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