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先行)학습이란 정상적인 학교교육 과정보다 앞서 진도를 나가는 사교육 프로그램을 말한다. 선행학습은 스스로 공부하는 예습과는 다르다. 한 학기 선행은 기본이고 대체로 1년, 심한 경우 3년씩 진도를 앞서 나간다. 선행이 너무 심하다 보니 중학생이 중학과정을 공부하려면 초등학생 학원으로 가야 할 정도다. 일부 특목고 교장들은 입시설명회에서 “우리 학교로 오려면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고 오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며 선행학습을 부채질한다.
▷선행학습이 제일 심한 과목이 수학이다. 지난해 7월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초등학교 4학년 이상에서 고등학생까지 학생과 학부모 4715명을 대상으로 수학 사교육 실태를 조사했더니 한 학기 이상 선행하는 비율이 초등학생은 64.2%, 중학생은 56.3%, 고등학생은 62.9%였다. 3년 이상 선행한다는 응답도 초등학생 3.47%, 중학생 2.09%나 됐다. 실제로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는 머리통이 자그마한 초등학생들이 중학생도 힘겨워하는 도형의 합동, 삼각함수, 등비수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선행학습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최영석 송파청산수학원 원장은 최근 열린 한 세미나에서 “선행학습을 한 학생의 70∼80%는 배운 게 배운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배운 걸 소화하지 못한 채 진도만 나간 학생들은 학습 결손이 누적돼 착실하게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따라간 학생보다도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얘기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상위 5% 안팎의 학생들은 선행학습 덕을 본다. 하지만 대다수는 기초를 충분히 다지지도 못한 채 선행학습에 시간, 돈, 체력을 낭비하고 있다.
▷교육당국이 교육과정을 설계할 때는 발달단계에 따른 뇌 구조와 학습역량을 감안해 만든다. 그런데도 내 자식만 손해 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학부모들은 자녀를 선행학습 학원으로 내몰고 있다. 학원들도 맹렬한 마케팅을 하고 있다. 영화관에서 맨 앞줄의 관객이 일어나서 영화를 보면 뒷줄 관객도 어쩔 수 없이 서서 영화를 관람해야 한다. 모두가 불편하게 영화를 보는 패자(敗者)가 되고 만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시민단체가 선행학습 금지법 제정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학습을 법으로 금지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론이 나오지만 오죽하면 이런 법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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