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미국 생물학자 그레고리 핑커스는 노르에신드론이라는 합성물질로 토끼와 쥐의 배란을 억제했다. 핑커스는 산부인과 의사 존 록의 도움으로 이를 알약으로 만들었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피임약의 출현이다. 이 약의 작동메커니즘은 인체가 임신 상태인 것처럼 뇌하수체를 속이는 것이다. 1960년 미 식품의약국(FDA)이 알약의 사용을 승인하면서 여성들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원치 않는 임신’의 공포로부터 해방됐다.
▷초기 피임약은 호르몬 농도가 강해 메스꺼움 구토 등 부작용이 컸고 유방암 발병 비율도 높았다. 지금의 피임약은 호르몬 농도가 예전의 10분의 1 이하로 줄어 부작용이 훨씬 덜하다. 가족계획을 권장하던 시기에 피임약이 우리나라에서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됐으나 세계적 추세는 다르다. 아무리 안전성이 높아졌더라도 피임약도 약물인 만큼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사후(事後)에 1회 복용하는 사후피임약과 달리 사전(事前)피임약은 다른 피임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가임(可姙) 기간에는 계속 시행해야 하므로 최고의 안전성이 요구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12년 만에 의약품을 재분류하면서 사후피임약은 일반의약품으로, 사전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하는 것은 여성의 임신 결정권을 빼앗는 일과 다름없다”며 반대한다. 대학 총여학생회는 학교마다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고려대는 “여성의 성적 결정권을 침해한다”며 반대한 반면 연세대와 한양대는 “오남용을 줄일 수 있다”며 환영하고 나섰다. 피임약이나 피임 교육이 혼전(婚前) 젊은이의 성생활을 문란하게 만든다는 증거는 없다. 학창시절의 임신은 학업의 지속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은 모두 중요한 가치다. 미국 캐나다 및 유럽 대다수 국가는 처방전을 받아 사전피임약을 복용한다. 스웨덴 노르웨이 등 성의식이 개방적인 국가들은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분류하되 청소년에게 주치의를 바꿀 권리를 준다. 딸이 주치의를 바꾸었다고 하면 부모는 딸이 성생활을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막아 여성건강을 지키고 사생활도 보호해주는 보건시스템이다. 우리도 피임과 여성의 건강권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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