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브레이크의 향연으로, 도로주행에서 떨어졌다. 사이드미러를 보지도 않고 차선을 두 번이나 바꿔버렸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검정관이 기어이 짜증을 냈다. 4만 원으로 재시험 기회를 사고, 버스를 탔다. 얼른 집에 가서, 백일도 안 된 둘째 녀석을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딴 생각을 하다가 두어 정거장 전에 내려버렸다. 기어이, 나도 내게 욕을 했다. 검정관이 미치도록 내게 하고 싶었을 그 말. 병신. 고개를 떨구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글자들이 타닥타닥 새겨진다.
형광색 비키니여야 한다. 그걸 입은 채 거울 속 나를 꼼꼼히 체크하며, ‘볼륨’이라는 것에 대해 점원과 심각하게 상의한다. 마늘 까는 엄마 손을 붙들고 나와 비싼 코스요리를 사준다. 불의는 참지 않는다. 모범택시를 타도 미터기를 보지 않는다. 결혼하는 누군가에게 꽃 백만 송이를 안겨준다. 폐지 줍는 할머니에게 에어가 빵빵하게 들어간 운동화를 사 신긴다. 생일 케이크를 먹지 않고 친구 얼굴에 박아버린다. 팬티 두어 장만 챙겨 훌쩍 여행을 떠난다. 풀냄새 나는 곳에서 만화삼국지를 끝까지 읽는다. PC방에 죽치고 앉아 스타크래프트를 한다. 새로 나온 술을 죄다 쓸어와 종일 홀짝거린다. 미장원이 아닌 헤어숍에서 머리가 맘에 안 든다며 “원장 불러와!” 하며 큰소리를 쳐 본다. 문어다리 질겅질겅 씹으며 주구장창 영화를 본다. 하늘 뻥 뚫린 스포츠카 타고 최신 유행하는 랩을 따라 부르며 쌩쌩 달린다. 라스베이거스 가서 돈을 싹 날리고선,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이렇게 말하는 거다. “휴, 오늘은 운이 나쁘군.” 북극이든 남극이든, 얼음집에 들어가 뜨끈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헤일망원경 꼭대기에 올라가 반짝반짝 별들 아래서 사랑을 속삭인다.
아니 이건 7년 전, 꼬깃꼬깃 적어 내려간 내 쌈지 속 글자들이 아닌가. 발로 툭툭 글자들을 차버렸다. 고개를 드니 횟집 앞이다. 탁한 수조에 비친 나와 마주쳤다. 낯설다. 누구냐, 넌? 참 뚱뚱하고 못생겼다. 저, 저, 옷 꼬락서니 보라지. 가오리처럼 생긴 정체 모를 물고기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웃는다. 그에 질세라 광어가, 우럭이, 개불이, 멍게가 따라들 웃느라 난리다. 비릿한 웃음이다.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부아가 오기가 되고, 오기가 에너지가 된다. 이것들이! 눈을 부라리니 앞다퉈 꽁무니를 뺀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턱을 치켜들고 걷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봤다. 주인 잃은 글자들이 길바닥 여기저기에 흉물스럽다. 그것들을 주섬주섬 주우며 중얼거렸다.
그래, 난 예민한 게으름뱅이야. 두 딸의 엄마지만, 아직은 엄마가 해주는 깻잎장아찌를 먹고 사는 철부지야. 돈 못 버는 작가고, 서른여섯 되도록 운전면허증도 없어. 출산 후유증이라고 둘러대기도 민망할 정도로 오랜 기간 지방을 축적하고 있으며, 발뒤꿈치 각질이 이불에 쓸려야만 꼼꼼히 발을 씻는 칠칠치 못한 인간이지. 먹지 않아야 빠질 살을, 대체 뭘 먹어야 빠질까를 고민하는 어리석은 인간이고, 산양분유를 집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하는 소시민이지. 내가 맘먹고 쓰기만 하면 베스트셀러는 일도 아니라고 믿는 망상증 환자에다 대단하게 예쁘진 않지만 매력 있는 얼굴이라고 말해주는 근거 없는 엄마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인간. 이게 나야. 2012년 6월의 나.
집에 돌아와 글자들을 정성스레 씻고 햇볕에 말렸다. 과감하게 몇몇 개는 버렸다. 새로운 글자들도 추가됐다. 그것들을 쌈지에 차곡차곡 넣다가 도로 꺼내 지갑에 넣었다. 언제든지 꺼내 쓸 요량으로. 4만 원이 나갔지만, 지갑은 더 두둑해졌다. 내 마음도 두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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