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아래 우이동 쪽으로 가다보면 도선사라는 절이 있다. 그 입구에 아주 눈에 띄는 불상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좀 웃긴다. 포대화상! 시커멓고 넓적한 얼굴에 몸매도 2.5등신 정도 될까 싶다. 비호감인데 보는 순간 웃음이 빵 터진다. 표정이 너무 천진난만해서다. 그는 커다란 포대(자루)를 메고 다니면서 탁발을 했는데, 포대가 꽉 차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차면 비우고, 비운 뒤엔 다시 채우고. 다만 이렇게 했을 뿐인데, 입적한 후 미륵불이 됐다. 엄청난 이적(異跡·신의 힘으로 이뤄지는 불가사의한 일)을 일으킨 것도, 거창한 설법을 행한 것도 아닌데, 웬 미륵불?
그렇다. 부처가 되는 건 이적이나 설법이 아니라 얼마만큼 소유로부터 자유로운지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많이 벌어서 많이 베풀면 좋지 않겠냐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증여의 핵심은 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유에 대한 탐착에서 벗어나는 ‘길(혹은 지혜)’을 여는 데 있다. 하여 역설적이게도 무소유보다 더 큰 증여는 없다. 포대화상이 바로 그런 경우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건만, 또 끊임없이 비우고 또 비웠건만 이토록 태평할 수 있다니. 증여 또는 무소유가 인간의 원초적 본능임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교환과 소유는 몸을 경직시키고, 관계를 단절시키고, 삶을 잠식해버린다. 이에 반해 증여는 근육과 표정을 이완시킨다. 낯선 관계를 친숙하게 만들고, 일상의 현장에 생기발랄함을 부여한다. 교환은 차갑고 탁하지만 증여는 따뜻하고 투명하다. 사람들의 길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힘도 거기에서 나온다.
버블 경제가 문제인 건 무엇보다 이 ‘증여 본능’을 차단하고 억압하기 때문이다. 하도 소유와 증식의 망상을 주입당하다 보니 사람들은 증여가 더 근원적인 욕망임을 망각하고 말았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웬 증여?’ ‘증여는 부자들이 세금 면제나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하는 짓일 뿐’ 등의 불신과 냉소가 골수까지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증여는 희생이나 베풂 이전에 인간의 보편적 특권이다. 선택이나 취향이 아니라 윤리적 필연이다. 왜냐면 그것이 곧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빅뱅 이후 태양계의 원재료가 된 기체 덩어리 근처에서 초신성 폭발이 있었다. 그때 초신성은 자신이 평생토록 만든 모든 무거운 원소를 은하 기체에 환원하고 일생을 마감했다. 현재 사람의 몸속에 있는 칼슘, 마그네슘 등 중원소는 이 초신성에서 만들어졌다. “인류는 모두 한 초신성의 후예인 셈이다. 수십억 년 전 이름 모를 초신성이 평생을 바쳐 모은 귀한 중원소들을 은하에 환원하지 않았다면 지구 생명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이석영, ‘일반인을 위한 빅뱅 우주론 강의’)
이 원리에 따른다면 생명은 초신성의 증여로부터 시작됐다. 아무런 조건도, 보상도 없는 절대적인 증여. 어디 그뿐인가. 태양 또한 아무 대가 없이 빛과 에너지를 선사한다. 말하자면 생명과 존재는 그 자체로 증여의 산물인 셈이다. 고로 이 증여 본능을 일깨우지 않고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거창하거나 요원한 일이 아니다. 일상의 현장 그 가까이에 있다. 포대화상이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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