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구두회사를 소재로 삼아 만든 방송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구두회사의 잘나가는 30대 이사와 짝퉁 구두업자의 알콩달콩 로맨스가 드라마의 주요 얼개. 로맨틱코미디의 여왕이라는 김선아의 연기력도 볼만하지만 그의 구두 패션 역시 이목을 끌고 있다. 그런 패션 감각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경성(서울) 거리에도 있었다.
광신양화점 광고(동아일보 1920년 6월 4일)는 구두 신은 발목 부분만 강조함으로써 시각적 주목 효과를 높였다. 한 청년이 구두를 신고 멋지게 걸어가는 순간을 부럽게 지켜보는 광경을 묘사한 컷은 수준급 카피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다. “아! 부럽도다./시원한 청풍 부난(부는) 곳에/산뜻한 양화(洋靴·구두) 신고/활발히 거러가난(걸어가는)/저- 청년의 보조(步調)!/저- 양화 지은 곳은?” 마무리 카피를 의문문으로 끝낸 카피라이터의 놀라운 솜씨를 보라! 1단 12cm라는 작은 크기의 지면에, 그리고 6줄이라는 짧은 카피에서, 짧고 강력하게 할 말을 다하고 있다. 더욱이 시적인 리듬감까지.
인류사에서 군대가 양복을 제도화했듯이, 신발의 서양화 역시 군대에서 시작되었다. 유모토 고이치(湯本豪一)는 ‘일본 근대의 풍경’에서 군비의 근대화를 도모한 바쿠후가 서양식 군대를 만들 목적으로 외국인의 지도 아래 군사훈련을 시작하면서 병사들의 복장을 양복으로 바꿨다고 썼다. 이후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며 복장에도 서양화 바람이 불어 양복이나 양화가 급속히 보급되었던 것.
서양화 바람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더 거세게 몰아쳤다. 1920년대 의류 광고에서 양화, 모자, 안경 같은 서양 패션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39.9%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는 사실이 그 근거다. 당시의 모던 보이들은 모던 걸들에게 더 잘 보이려고 패션 액세서리를 걸치고 거리를 ‘활발히’ 쏘다녔을 터. 정치적으로는 국권을 잃은 식민지 시대였어도 자신의 패션 감각에만 신경 쓴 사람도 많았으리라.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패션 디자이너 오스카 드 라 렌타는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꿰뚫어 보고 ‘패션은 비정치적’이라고 말했을까? 구두회사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적인 명작 광고에서 패션의 비정치성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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