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에서 ‘월간 에세이 25년간 결호 없이 발간해온 원종성 회장’이란 기사를 발견했을 때 앞뒤 수식어는 모두 사라지고 ‘에세이’라는 단어만 머리에 남았다. 그 세 글자가 나를 자꾸 어딘가로 이끄는 듯했다. 마치 먼 바다 쪽으로 발목을 잡아당기는 썰물처럼….
이게 뭐지?
여러 날이 흐른 뒤 15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월간 에세이’를 찾았다. 25주년 기념호에 문학평론가인 권영민 월간 문학사상 편집주간의 축사가 실려 있었다. “월간 에세이는 보통의 잡지가 아니다. 생활 속의 글쓰기를 생각한다면, 월간 에세이를 빼놓을 수가 없다… 글이라는 것이 겁을 먹을 일이 아니라는 것도 가르쳤고, 생활의 진실이 없으면 글도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깨칠 수 있게 했다.”
시인인 장석남 한양여대 교수의 글도 있었다. “월간 에세이는 내 삶의 후원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낮이 있다면 반드시 저녁이 있습니다. 그 저녁의 짧은 시간이 어쩌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그 같은 잡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념 대결과 압축성장의 거친 호흡이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한국 사회, 더구나 도시에서의 저녁은 장 교수가 말하는 그 저녁, 하루를 마감하고 되새기는 그런 저녁이 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권 주간과 장 교수의 축사를 읽으면서 에세이라는 게 새삼 나를 잡아 끌어당긴 이유를 어슴푸레하게나마 깨달았다. 저녁 무렵, 생활의 전선(戰線)이 아니라 삶의 후원(後園)에 앉아 스스로를 진실하게 마주 보는 일, 그것이 바로 에세이임을…. 에세이 쓰기란 바로 그런 시간임을….
그런 시간을 오랫동안 갖지 못했음을 알았다.
전업작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25년간 그런 시간들을 나눠 준 월간 에세이는 권 주간의 축사 그대로 ‘보통의 잡지’가 아닌 게 틀림없다. 1966년 동양엘리베이터를 창업한 원종성 주간(75)도 보통의 에세이스트는 아니었다.
“전에는 신문사 신춘문예에도 에세이 부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 없어졌습니다. 수필(隨筆)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라는 교과서적 정의가 각인이 돼 시나 소설보다 가볍다고 생각하고, 경시하는 분위기가 여전합니다. 우리나라만 장르를 구분하고, 등단제도를 두고 있는 것도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월간지 제목도 ‘에세이’라고 하고, 어떻게든 승화시켜 보자고 나선 겁니다. 요즘은 신문에서도 ‘에세이스트’라고 쓰지만 에세이라는 제호를 사용한 것은 월간 에세이가 처음입니다.”
―그런가요?
“그전에는 한국수필, 수필문학, 수필공원이라는 식이었습니다. (손바닥 노트를 꺼내보며) 김 기자가 ‘에세이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해서 한번 정리해봤는데 에세이는 시나 소설에서 얘기하기 힘든 인간의 진실을 짧은 글 속에서 순간적으로 일깨우는 그만의 독특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글들이면 장르 구분 없이 모두 모아보자고 월간 에세이를 만들었습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에세이는 서정적인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논쟁이나 지적인 요소의 유무보다는….”
―권 주간도 말했듯이 에세이는 역시 누구나 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 아닌가 싶습니다. 문단의 시각으로 보면 평가절하의 요소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죠. 문단 일부에서는 ‘그게 글이냐’고 하지만 에세이는 인격의 표출입니다. 누구나 인격을 표출할 수 있죠. 물론 표출했다고 무엇이나 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용기는 가질 수 있는 게 에세이입니다. 지금 저희들은 200자 원고지 8장 분량을 소개하고 있지만 하도 복잡한 시대라 4장으로 줄이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4장은 너무 짧지 않은가요?
“젊은이들이 책은 안 보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니 어쩌겠습니까. 짧은 글이라도 읽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 창간할 때도 본격 수필은 20장이 넘어야 하는데 8장이 뭐냐는 등 비판이 많았습니다. 일주일 가면, 6개월 가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엘리베이터 장사를 해왔고 문단에 목을 맨 사람이 아닙니다.”
―선린상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몇 년 있다가 동양엘리베이터를 창업하셨던데 1960년대에 엘리베이터 사업에 착안한 게 놀랍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100달러를 가지고 세계여행에 나섰습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을 여행하고 돌아오니 누가 김찬삼 씨의 ‘세계일주여행가협회’에 가입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더군요. (웃음) 가보니 모두 12명이었습니다. 여하튼 이탈리아를 둘러보는데 공중에서 뭐가 돌아가고 있는 현장이 많더라고요. 뭐냐고 물으니 고층 아파트를 짓기 위한 타워크레인이라는 겁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아파트 붐이 일었습니다.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봤습니다. 20, 30년 뒤엔 한국도 아파트 붐이 일고 엘리베이터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생각했죠. 엘리베이터 회사를 찾아가 대리점 계약을 하고 서울 세운상가에 4대인가 5대를 갖다 놨는데 한 10년은 반(半)놈팡이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10년쯤 지나자 아파트 붐이 일면서 오티스라는 회사에서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화신백화점에 승강기를 설치한 일본인 이후 한국에서 엘리베이터를 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거든요. 하지만 오티스는 기술이전을 해주지 않았고 또 국내에서도 뒤늦게 몇몇 재벌이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도시바와 합작해 기술이전을 받았습니다. 재벌들과 30년이나 ‘엘리베이터 전쟁’을 치렀지만 한때는 시장점유율이 30%나 됐습니다.”
―월간 에세이는 어떻게 발간하게 된 겁니까?
“그전에 월간 ‘세대(世代)’지에 글을 쓰면서 에세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작고한 언론인 오소백 씨와 함께 ‘수상(隨想)’이라는 잡지를 냈는데 너무 끼리끼리의 문단 중심이라 결국 잡지와 단행본 등 트럭 12대분을 한국제지 양잿물 속에 갖다 부어버리고 그만뒀습니다. 동대문시장에 가면 싼값으로 처분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인연으로 월간 에세이를 하게 됐습니다.”
―이상한 인연이라니요?
“육사 화랑대장 출신의 이현부 중장이라는 먼 처남이 있었습니다. 1992년 헬기 사고로 사망했는데 추락 당시 군단참모들이 군단장만은 살려야 한다며 서로 껴안고 떨어질 정도로 신망이 두터운 군인이었습니다. 하루는 술을 먹는데 나보고 ‘그렇게 글을 좋아하는데 더 이상 잡지를 내지 못해서 한(恨)이 되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사실 왜 문예지는 망할 수밖에 없는지 속으로 한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내가 ‘전두환이 언론사고 출판사고 다 빼앗아버렸는데 되겠느냐’고 고개를 저었더니 당시 군 출신 문화부 장관에게 전화를 한 모양입니다. 장관이 불러서 ‘평생 부탁이라고는 모르던 현부가 술에 취해 전화를 했더라. 오죽 해주고 싶었으면 공중전화를 했겠느냐. 정부 비방만 하지 마라’면서 허가를 내줬습니다. 처남이 그렇게까지 했는데 안 할 수가 없었죠.”
―잡지 중간쯤 ‘이달의 에세이’가 실리는 페이지를 보니 원고지 느낌이 나도록 종이 바탕을 만들어놨던데 회장님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신 겁니까?
“하나부터 끝까지 제가 아이디어를 냅니다. 원고지 바탕은 한 4년 전부터 했습니다. 전부 하늘을 향해 머리를 흔드는데 땅에다 박는 한 놈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고지에 쓰인 글을 보면 영혼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원고지도 그렇고 신문도 그렇고 요철(凹凸)이 있지 않습니까. 인쇄활자엔 굴곡이 있거든요. 요철이 있어야 영혼이 담깁니다. 인터넷도 좀 보지만 거기엔 요철도, 되새김도 없습니다. (스마트폰만 쳐다보게 만든) 스티브 잡스가 젊은이를 모두 치매로 만들고 말겁니다.(웃음)”
놀라웠다.
비유거나 아니면 ‘환각의 다리’ 같은 오랜 습관이겠지만 원고지와 신문에서 활판인쇄 시절의 ‘요철’을 느낀다는 얘기에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에세이는 인격의 표출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에세이야말로 ‘지성의 관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성찰을 담되 신변잡기에 빠지지 않고 보편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래서 개인의 교양을 넘어 공동체의 담론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런 게 바로 에세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격 에세이에 관해 얘기가 많지만 저는 월간 에세이가 비(非)문인들이 문학에 다가가는 교량이라고 생각합니다. 끼리끼리만 통하면 사회에 기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권 주간이 축사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글을 쓰고 싶어 한다. 이것은 자기 과시가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자기 존재의 확인법에 해당한다’고 했는데 바로 제 얘기를 대변해준 겁니다. 에세이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지만 창피당하지 않을까 하고 겁을 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게 월간 에세이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겉돌았지만 더는 붙들지 않았다. 그는 “나는 본격 문학, 본격 수필은 모른다”고 했다. 필자도 문학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에세이도 있던데 어떻던가요?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때 쓴 글인데 뭐 그냥 그렇고 박 대표의 에세이는 좋았다. 정치인으로는 보기 힘든 글이다. 사실 박 대표는 정식으로 등단한 수필가다.”
이 대통령은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느낀 것들을 썼고 박 전 위원장은 17대 국회의원 시절 ‘내 삶의 등대가 되었던 동양철학과의 만남’이라는 에세이를 기고했다. 10·26 이후 박 전 위원장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보도를 보니까 13만 부나 나간다고 하던데 월간 문예지로는 놀라운 부수인 것 같습니다. 에세이를 기고한 사람도 1만5000명이나 되고….
“문예지는 한 달에 1만 부도 안 나가는 잡지가 수두룩합니다. 우리가 13만 부 찍는다니까 사람들이 하도 안 믿어서 인쇄소 윤전기 돌아가는 사진하고 광화문우체국에 잡지 쌓아놓은 사진을 찍어 광고까지 냈습니다. 지금은 군대에 3만5000부가 들어가고 보험설계사들이 많이 사갑니다. 고객들에게 멸치 선물하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병원에도 가고 변호사 사무실에도 가고…. 현상 유지가 안 되면 도둑놈이라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돈을 버는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계산을 해보니 제 돈이 한 60억 원 정도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저가 월간 에세이를 발간하는 것은 순명(順命)이고 숙명(宿命)입니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갈 무렵 용돈을 무기로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에세이를 써오도록 강요한 적이 있다. 지성을 가늠해보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의 정신세계를 엿보고 싶었다. 아이는 ‘시사교양의 부재’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왔다. 기대한 만큼의 에세이는 아니었지만 실망할 정도는 아니어서 ‘다소’ 안도했다. 문득 그때 일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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