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민동용]말(言)의 인플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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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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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TV 쇼 프로그램에 인기 절정이던 댄스그룹 H.O.T.가 출연했다. 공개홀을 가득 채운 어린 관객의 울부짖음 섞인 환호에 정신이 팔렸는지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외쳤다. “한국의 비틀스, H.O.T.입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일개 댄스 그룹을 비틀스에 비교하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해서다. 그런데 요즘 방송을 보면 이런 일은 애교에 속한다. ‘록의 전설’이니, ‘발라드의 여신’이니 하면서 좀 실력 있는 가수나 그룹은 무조건 만신전(萬神殿)에 올려놓는다. 말(言)의 인플레이션 시대다.

▷말의 인플레이션은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언어가 범람하는 이 시대의 현상만은 아니었나 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동명 원작소설을 쓴 작가 앤서니 버지스는 1964년 펴낸 책 ‘평범해진 언어(Language Made Plain)’에서 ‘그저 선율이 아름다운 팝송을 기막히게 멋지다고 말한다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은 도대체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라며 통탄했다. 그는 ‘과장된 표현이 모든 의미를 망쳐 놓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가 현 정부를 두고 “패악무도(悖惡無道)한 정권”이라고 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난, 흉악하며 막된 정권’이라는 것이다. 현 정권을 어떻게 칭하건 그건 말하는 사람의 자유다. 하지만 궁금한 게 있다. 이 대표는 1970년대 유신독재와 1980년대 권위주의 군사정권 시대에 저항했다. 그렇다면 이 대표는 당시의 정권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패악무도한 정권이란 연산군이나 로마 시대 네로 황제의 통치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4월 총선에서 민주당의 절대 약세 지역인 대구에 출마했다 떨어진 김부겸 전 의원은 대구 민심을 돌리기 쉽지 않은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도 이명박 정권이 잘못했다는 걸 안다. 그런데 이 정권이 잘사는 나라를 하루아침에 망쳤다는 식으로 오버하는 걸 싫어한다. 그런 게 자꾸 쌓이니까 민주당에 대해 고개를 돌려버리더라.” 현실과 동떨어진 과장이나 독설보다는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야 너른 공감을 살 수 있다.

민동용 주말섹션 O₂팀 기자 mindy@donga.com
#말#인플레이#이해찬#민주통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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