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서울 강남의 2층 단독 주택을 찾았다. 1990년대 후반 어느 여름날이었다. 당시 미국 아마추어 골프에서 통산 55승을 거두며 이름을 날리던 박지은의 어머니는 앨범을 보여주며 흐뭇해했다. 리틀 미스코리아로 뽑혀 한껏 멋을 내거나 신나게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꼬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건 지난주 박지은이 갑자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은퇴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국내만큼이나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아직 한창 필드를 지킬 나이인 33세의 박지은. 그래도 그는 “너무 지쳤다. 이젠 벗어나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시절 꿈 많던 그는 골프라는 한 우물을 파면서 운명이 달라졌다. 골프 유학을 위해 12세 때 부모 곁을 떠나 낯선 미국으로 향했다. “친구 생일 파티에서 놀다 어쩔 수 없이 공을 치러 가야만 했어요.” 운동에 전념한 끝에 아마추어 최강에 오른 데 이어 2000년 LPGA투어 데뷔 후에도 승승장구했다. 그가 우승한 날 아버지가 서울 강남에서 경영하는 유명 갈비집인 삼원가든은 갈비탕을 공짜로 제공하거나 갈비값을 50% 깎아줘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지만 그는 2005년부터 허리와 고관절 부상에 시달리다 두 차례 수술대에 누웠다. 조급증에 온전치 않은 몸으로 성급히 복귀했다가 병을 키웠다. 지난해 컨디션을 되찾고 올해 재기의 희망에 들떴으나 7개 대회에서 5차례 예선 탈락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골프가 싫었어도 트로피는 좋았다”고 털어놓던 그에게 무관의 세월은 견디기 힘들었다.
철학서 ‘피로사회’의 저자인 한병철 교수는 스포츠 심리학에도 등장하는 ‘번아웃(Burnout·소진)’이란 현상에 주목했다.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다 자신의 모든 걸 태워버려 더이상 뭔가를 할 육체적, 정신적 의욕이 사라진 상태다. 문제는 박지은에게 이런 고갈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는 데 있다. 어디 그뿐이랴. 전반적인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세계 최강이라는 한국 여자골프에서 선수 수명은 짧다. 20대 중반이면 노장 취급이다. 어릴 때부터 오로지 운동만 하다보니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루면 안주한다. 부상이나 슬럼프에 쉽게 노출되지만 극복은 쉽지 않다. 스포츠 천재였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사례도 허다하다. 지난해 춘천에서 골프 클리닉을 하던 타이거 우즈를 만났을 때 일이다. 당시 우즈는 어린 선수들에게 “더 가르칠 게 없다. 왜 왔느냐”며 웃었다. 지난주 US오픈에 출전한 우즈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다시 언급했다. “어린 선수들이 하루에 몇 시간씩 공을 치며 다들 비슷한 스윙을 하고 있다.” 획일화된 훈련으로 개성을 잃게 하는 선수 육성 시스템을 꼬집는 뉘앙스였다.
김연아가 올림픽 금메달을 딴 뒤 펑펑 운 것은 혹독한 훈련 과정을 끝내게 된 안도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박세리는 최악의 부진에 허덕일 때 아버지에게 “왜 쉬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80세까지 일한 비결에 대해 “쓸데없는 일로 나를 피로하게 만들지 않았을 따름이다. 앉을 수 있는 곳에서는 앉고 누울 수 있는 곳에서는 누워서 쉬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쩌면 해답은 쉽고 가까운 데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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