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중현]인생을 낭비시킨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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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20일 03시 00분


박중현 경제부 차장
박중현 경제부 차장
“너는 살인죄로 기소된 게 아니다. 네가 저지른 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흉악한 범죄. 바로 인생을 낭비한 죄다.”

살인누명을 쓰고 절해고도(絶海孤島)의 감옥에 수감된 빠삐용은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혀 독방에 갇힌다. 꿈속에 나타난 재판관에게 “나는 무죄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며 항변하던 그는 ‘인생을 낭비한 죄’란 판결에 힘없이 무너진다. “유죄입니다.”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 건 최근 읽은 외신기사 때문이었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최근 부모 학력이 고졸 이하인 청소년들이 부모가 대학 이상을 졸업한 집안의 자녀들보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고 보도했다. 1999년 하루 16분이던 이 ‘시간낭비 격차(time-wasting gap)’는 2010년에 90분으로 벌어졌다.

그 차이는 PC TV 게임기 스마트폰 등을 이용하는 자녀를 통제할 지식을 부모가 갖췄느냐 아니냐에 따라 발생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디지털기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맞벌이 등으로 시간에 쫓기는 저학력, 저소득층 부모들이 자녀의 시간낭비를 적절히 통제하지 못해 학력격차 등 문제가 발생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 청소년이나 청년층의 경우 미국과는 전혀 다른 낭비가 더 큰 문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서 한국의 청년 한 명이 4년제 대학 진학으로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등록금과 4년간 다른 일을 해 벌 수 있었던 임금손실을 합해 1억1960만 원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한국경제 전체로는 한해 19조 원이나 된다. 초중고교 과정에서 쓴 사교육비 지출을 합하면 규모는 훨씬 커진다.

게다가 대학진학률이 2008년에 83.8%까지 상승한 뒤 크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전체 근로자의 축적된 지식, 기술의 총량을 보여주는 ‘인적자본 성장률’은 1991년 이후 하락 추세다. 대학에 더 많이 가는데도 경제성장에 필요한 역량은 오히려 줄었다는 뜻이다.

경제학적으로 볼 때 낭비는 경제(economy)의 적대적 개념이다. 제한된 자원을 활용해 생산 소비 분배의 전 과정에서 낭비를 없애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 경제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대학교육은 비(非)경제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인생의 낭비를 경제적으로만 환산할 순 없다. 학력 인플레이션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홀로 대학에 가지 않았을 때 느끼는 소외감, 자녀를 대학에 보내지 못한 부모의 죄책감 등은 투입과 산출만으로 계산될 수 없다.

그래도 대학졸업자의 42% 정도가 실업자거나, 학력을 낮춰 취업하는 등 ‘과잉학력’ 문제를 겪고 있는 건 심각한 문제다. 우리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의 한계를 초과한 대학졸업자가 양산되고 있다는 의미다. 요즘 대기업, 금융권이 고졸자 채용을 늘리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청년층의 총체적인 시간, 비용의 낭비를 해소하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통합당이 19대 국회에 ‘1호 법안’으로 낸 반값등록금 방안을 생각하면 착잡해진다. 대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을 줄여야 하지만 대학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 진학의 기회비용을 낮추면 과잉학력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

지금의 청소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해 괴로워할 때 책임은 누가 져야할까. 과거 정치권의 대중영합주의와 부모들의 과도한 교육열에 대해 그들이 제기할 죄목은 바로 ‘내 젊은 날의 인생을 낭비시킨 죄’가 될 것이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살인죄#대학졸업자#과잉학력#취업준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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