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째 이런 일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 한마디는 1995년 최고의 유행어였다. 김영삼 정부 때 대형 부실사고가 유달리 많았다. 집권 첫해인 1993년 서해 페리 참사,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서울 아현동 가스폭발사고로 이어지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정점을 찍었다. 그래서 ‘부실사고 공화국’이란 오명이 붙어 다녔다. 사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책을 동원했으나 뭘 해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오원춘 사건 생생한데 또 신고묵살
경기 수원에서 20대 여성을 납치 살해한 오원춘 사건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또다시 112 신고 묵살사건이 발생했다. “우째 이런 일이”란 탄식이 절로 나온다. 경찰청장까지 물러나며 재발 방지를 철석같이 약속했던 게 불과 두 달 전이다. 112 대응시스템도 확 바꿨다. 인력 교체와 증원도 이뤄졌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그 동네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12 신고를 한 피해 여성은 사태의 심각성과 함께 집 주소까지 정확하게 알려줬다. 112 종합상황실은 주변을 순찰하던 경찰에 바로 출동을 지시했다. 그런데 그냥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을 경찰은 굳이 신고자에게 전화를 했다. 더 이해하기 힘든 사실은 피해자도 아닌 가해자의 “신고하지 않았다”는 말 한마디에 현장 확인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나태와 안이함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112 신고가 중요한 이유는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여기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 자신의 생명과 신체 그리고 재산을 지켜주지 못하는 경찰을 누가 믿겠는가. 경찰에 신고를 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빨리 와서 도와달라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번번이 경찰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다. 112 신고 시스템을 대폭 보완했는데도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결국 시스템이 아닌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경찰은 요즘 분위기 쇄신을 위해 ‘초심 찾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현장점검단도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고 있다.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경찰쇄신위원회’도 만들었다. 경찰 자체 노력만으로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기 어렵다는 자성(自省)에서 ‘시민감찰위원회’를 만들어 경찰 부패와 비리를 끊으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윗목, 아랫목 따로 노는 이유가 뭐고, 지시와 명령이 먹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경찰조직의 문제는 감동이 없다는 데 있다. 감동은 희생과 헌신에서 나온다. 희생과 헌신은 조직과 자신에 대한 강한 일체감과 자부심에서 비롯된다. 헌신에 대한 명예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 및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인 희생과 헌신의 강요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다. 자칫 무리하다가는 징계 받고 직장까지 잃을 수 있는데 누가 헛된 의욕을 앞세우겠는가. 열심히 일하다가 생긴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제도적 보완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스템 아닌 ‘사람의 문제’ 보여줘
실제로 이번 수원 여성 폭행사건을 비롯해 그동안 생긴 경찰 관련 문제의 대부분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몸조심하는 데서 발생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비단 경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얘기들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조직문화에서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대충 시늉만 해도 넘어갈 수 있는 곳에선 실효성 없는 지시와 교육 내용은 의미가 없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끔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
문제 해결의 핵심은 항상 단순하다. “열심히 해도 탈이 없게, 그러나 열심히 하지 않으면 탈이 나게.” 쉽고도 어려운 얘기다. 그러나 또다시 수원사건과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경찰이 숙고하고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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