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의 봄, 서여 민영규 선생님은 강화학파 유적지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셨다. 초피봉과 옹일산이 바라보이는 가파른 산에서는 아름드리나무가 솟아나 있는 이충익의 무덤 앞에서, 종이봉투에 싸 오신 술병을 꺼내셨다. “잔을 올려 드려요. 앞으론 심 교수가 다른 사람을 안내하세요.” 강화도 피택의 물이 질펀하게 빛났다. 당시 서여 선생님은 78세, 연세대 명예교수셨다. 서여(西餘)는 형제들 가운데 막내라 서쪽 자투리땅을 유산으로 받았다고 해서 해학적으로 붙이신 자호다. 그러나 우반(又半)이라는 호가 그러하듯 서여란 호도 궁극의 이상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겸허한 마음가짐을 드러내신 것이리라.
1991년 여름에는 선생님을 모시고 신라 김화상의 사적을 조사하러 중국 베이징(北京)과 쓰촨(四川) 성 청두(成都)를 답사했다. 선생님은 블랙커피 한 잔과 담배 한 대로 아침 식사를 대신하시고는 그날 돌아보아야 할 곳을 지도나 방지(方志)에서 짚어 주셨다. 국학의 기본정신이 무엇이고 국학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를 그 20여 일 동안 전부 배웠다.
나는 1975년 서울대에 입학하면서부터 국문학에 관심을 가져 2학년 2학기 학과 배정 때 국문학과를 지망했다. 이후 언어학적 분석방법을 배우려고 국어학 강의를 수강하고, 사유 방법을 다지기 위해 철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또한 이병근 선생님과 정병욱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학문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됐으며, 신호열 선생님께 나아가 매주 4일간 한문 고전을 읽었다. 한문학 결산보고서를 서둘러 작성하려 했던 김태준(천태산인)의 생각에 공감하기도 했으나 한문고전과 한문학에 독자적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대학원 때 한쪽 눈의 망막이 손상됐으나 좌절하지 않았다.
이때 정병욱 선생님께서 요시카와 고지로(吉川幸次郞)의 중국학 전통을 이은 교토대에 가보라고 권하셨다. 그 말씀에 따라 1983년 4월부터 교토대 문학부에 연수원으로 있다가 겨울에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에 편입학했다. 중국문학과에 소속돼 있으면서 문사철의 스승들로부터 고증학과 문헌학을 공부했다. 1989년 4월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어문연구실에 조교수로 재직하게 됐는데, 1990년 정양완 선생님의 부탁으로 서여 선생님이 특강을 나오셨다. 이때 선생님은 한국지성사의 계보에 대해 폭넓게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주셨다. 서여 선생님께서 제자로 받아주지 않으셨더라면 나는 한문 전적을 조금 독해할 줄 안다는 것만으로 자족했을 것이다.
서여 선생님은 글을 많이 남기지 않으셨다. 주옥들은 ‘강화학 최후의 광경’과 ‘사천강단(四川講壇)’에 모두 들어 있다. 젊은 시절 연극 대본을 즐겨 읽으셨다는 선생님은 짧은 글 속에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켜 서로 대화하고 논쟁하고 교감하게 만드시곤 했다. 1964년 팔레스타인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오신 뒤 1966년 9월부터 두 해에 걸쳐 집필하신 ‘예루살렘 입성기’에 기독교 성지를 돌아보시면서 선사들에 관해 사색한 내용을 적어 동과 서의 사유체계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1987년 6월 ‘회귀’ 제3집에 게재한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는 일제의 강제 합방 때 만주로 떠난 이건승이 황현의 아우 황원과 신교를 맺었던 사실을 시적으로 묘사하셨다.
서여 선생님은 위당 정인보 선생의 수제자다. 6·25전쟁 직후에는 전국의 문화재와 고전적을 몸소 조사하셨다. 문헌에 밝으셨기에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 1책에 실린 ‘우세화시집’이 정약용의 저작이 아니라고 밝히실 수 있었다. 게다가 서여 선생님은 후스(胡適)와 함께 당대철학사를 다시 집필할 계획을 세우실 만큼 동아시아의 불교철학사에 정통하셨다. 후스의 방문을 기대해 선생님께서 조성하셨던 진달래 밭은 지금 연세대 본관 앞을 장식하고 있다.
나는 생전의 서여 선생님께 위당 정인보의 ‘양명학연론’을 이어 강화학파에 대한 보고서를 내겠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의 훈도를 받기 시작한 지 벌써 스무 해 남짓. 조만간 ‘강화학파: 실심실학의 계보’를 출판할 계획이지만, 해타를 접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