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철희]6·29에 7·4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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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29일 03시 00분


이철희 정치부 차장
이철희 정치부 차장
오늘 경기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는 제2연평해전 1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2002년 6월 내내 전 세계를 달군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열기 속에 서해를 지키다 스러져간 해군 6용사의 희생은 한동안 잊혀졌던 게 사실이다. 올해는 군 통수권자로서 이명박 대통령도 참석한다니 이들의 헌신을 제대로 기리는 추도행사가 될 것 같다.

이제 어느덧 ‘호국보훈의 달’도 끝자락이다. 현충일(6일)과 6·25전쟁, 제2연평해전 발발일이 있는 6월은 전쟁과 순국, 그리고 추념의 달이다. 한편으로 6월은 12년 전 남북이 첫 정상회담을 열어 6·15공동선언을 도출한 달이고, 25년 전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으로 ‘1987년 체제’를 연 민주화운동의 달이기도 하다.

6월은 이처럼 다양한 성격의 기념일들이 혼재해 있다보니 새삼 이념 논쟁도 치열해지는 시기다. 특히 올해엔 주사파 세력의 행태를 둘러싼 종북(從北) 논란까지 더해져 애국과 반북, 국가관 등 안보 담론이 지배하면서 어느 때보다 어수선했다.

6월을 마무리하면서 또 하나의 기념일을 떠올려 본다. 꼭 40년 전 오늘, 남북 정권의 실질적 2인자 두 사람은 ‘서로 상부(上部)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 김영주’라고 타이핑된 문서에 각각 서명한 뒤 판문점을 통해 교환했다. 국호도 없고 상부가 누군지도 밝히지 않은 ‘형식요건 불비’ 문서였지만 이는 남북 당국 간 최초의 합의서였다.

당초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다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함께 발표하기로 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막판에 이후락의 방북에 반대했다. 남측이 갑자기 ‘말 못할 내부사정’이라며 발표 형식 변경을 요청하자 북측은 “그럼 어쩔 수 없다”며 마지못해 수용했다. 그 사이 양측 간 직통전화에는 상당한 긴장이 감돌았다.

닷새 뒤 세상에 나온 7·4공동성명은 당시 동아일보 표현대로 ‘언젠가는 있을 법도 하다고 생각됐지만, 그야말로 당돌하게 이뤄진’ 것이었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은 발표 직후부터 남북간에 극명한 해석의 차이를 드러냈지만 이후 모든 접촉과 대화의 전제가 됐다. 올해 2월로 발효 20년이 된 남북기본합의서도 3대 원칙을 재확인했다.

사실 7·4공동성명과 기본합의서는 각각 데탕트와 냉전종식이라는 국제 정세의 격변에 남북 정권이 다급하게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이 중국과 악수하고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는 위기감 속에서 북한에 밀사를 보냈고, 김일성 정권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버림받는 처지에 놓이면서 남측과 합의를 서둘렀다.

주변 정세에 밀려 급조된 두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7·4공동성명 이후 남북의 권력자는 각각 유신헌법과 사회주의헌법을 통해 ‘종신 대통령’과 ‘영원한 수령’의 길을 갔다. 기본합의서도 북핵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구체적 실천에 들어가지 못한 상징적 문서로 남았다.

남북 관계가 단절된 지금, 7·4공동성명은 잊혀진 역사가 된 듯하다. 하지만 다시금 남북이 대화에 나설 때 그 시작은 남북 합의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비록 정략적 임시변통의 화친(和親)이었을망정 그 합의는 위험한 대결보다 낫다는 교훈과 함께….

40년 전 이후락은 대결보다 대화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우리는 ‘대화 없는 대결’에서 ‘대화 있는 대결’의 시대로 옮겨갑니다. 사상과 이념이 극과 극으로 다른 체제끼리의 대화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며, 어느 모로는 대화 없는 대결보다도 더 어려운 대결입니다.”

이철희 정치부 차장 klimt@donga.com
#제2연평해전#제2함대사령부#호국보훈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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