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빈곤 3대 밀착 연구…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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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3대 밀착 연구…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옛날엔 모두 가난해 빈곤문화 없었지만 지금은 소통단절의 빈곤문화 존재”

사당동 달동네, 상계동 임대아파트로 이어지는 한 빈민가족을 25년간 만나면서 빈곤 3대를 연구한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사회학)는 “우리 사회 빈곤구조는 이제 너무 공고해져 계층 간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며 “양극화니 복지니 하는 말을 먼저 꺼내기 전에 한국사회 빈민들의 참모습을 먼저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사당동 달동네, 상계동 임대아파트로 이어지는 한 빈민가족을 25년간 만나면서 빈곤 3대를 연구한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사회학)는 “우리 사회 빈곤구조는 이제 너무 공고해져 계층 간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며 “양극화니 복지니 하는 말을 먼저 꺼내기 전에 한국사회 빈민들의 참모습을 먼저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1986년 여름 서른아홉살의 사회학자인 조은 동국대 교수(66)는 아시아경기를 앞두고 철거가 한창인 서울 사당동으로 들어갔다. 유니세프가 지원해준 ‘불량주거지역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서였다.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은 총 4000여 명. 상당수는 서울 양동 등 도심 무허가촌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사람들이었다. 조 교수는 22가구를 선정해 집중 연구에 들어갔다. 연구원 중 일부는 아예 거처까지 이곳으로 옮겨 연구를 진행했다. 아들하나와 손자녀 셋 총 다섯 식구의 정금선 할머니 가족은 연구 대상 가구 중 하나였다. 6·25전쟁 때 월남한 할머니는 남대문시장에서 노점을 하며 양동의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아들 딸과 살다 1965년 가을 새벽에 몰아닥친 철거반원들 트럭에 태워져 숲이 무성하던 사당동 산등성이에 던져졌다. 천막으로 집을 짓고 대소변도 갈대밭에서 해결하기를 2년, 서울시가 시유지(市有地) 산을 분할해 가구당 10평의 땅을 배분해주면서 본격적으로 사당동 달동네 생활이 시작된다.

정 할머니를 비롯해 행상이나 일용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던 주민들은 한동안 상하수도가 없어 물을 길어 먹었고 버스가 없어 출퇴근도 걸어서 했다. 하지만 조 교수가 이 지역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10평이 1억 원을 호가할 정도로 투기바람이 드센 지역으로 변해 있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지 3년 만이라 한국의 달동네를 처음 경험했다는 그는 “당시만 해도 빈민촌 하면 미국 슬럼가를 생각했지만 사당동은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동네였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가면 주거환경은 끔찍할만큼 열악했다. 세 평 남짓한 방 안에서 반듯하게 누워 자는 것이 불가능해 몸의 옆 부분을 바닥에 댄 채로 자는 게 칼을 세워놓은 것 같다 해서 ‘칼잠’이라 한다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강제철거로 1989년 주민 모두가 떠나고 다행히 정 할머니 가족은 철거민들을 위해 막 조성되기 시작한 상계동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얻어 가게 됐다. 연구팀은 해체됐지만 조 교수는 ‘도시 빈민들이 주거 문제만 해결되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화두를 갖고 다시 정 할머니 가족을 찾았다. 그리고 2011년까지 할머니 모자와 손자 손녀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지켜봤다. 조 교수는 그렇게 한 가족의 25년을 지켜본 결과물을 최근 펴낸 ‘사당동 더하기 25’에 담았다. 올해 2월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명예교수(동국대 사회학과)로 있는 그를 지난달 29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그가 낸 연구 결론부터 궁금했다.

―빈민 연구의 결론은 뭔가.

“한마디로 우리 사회 빈곤구조는 25년간 너무 굳어져서 이제 계층이동이 너무 어려워졌다는 것을 절감했다. 출발선에서 너무 격차가 심하다. 사당동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일곱 살, 열 살, 열세살이던 할머니 손자녀들은 이제 그들 아버지 나이에 들어섰지만 모두 평생 빈곤에 허덕이던 아버지, 할머니의 삶보다 나아진 게 없다. 임대아파트 얻은 것 빼고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중학교를 중퇴한 정 할머니 아들은 공장, 중국집 배달, 건설 노동을 전전하다 예순이 넘은 지금도 불러주기만 하면 일을 나간다. 스물셋에 동네 술집 딸과 결혼해 3년 터울로 아이 셋을 낳았지만 부인이 춤바람이 나 가출했다. 상계동 임대아파트로 온 뒤에는 중국 옌볜(延邊)에서 조선족 여자를 데려왔지만 1년도 안돼 도망갔다. 그 후 같은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여자와 동거했지만 나중에 여자가 폐암으로 죽는 바람에 지금은 혼자 산다. 이런 사례는 이들 계층 어디서나 들을수 있는 이야기다.”

이어 조 교수는 “산업화가 본격화된 1970년대에 출생한 그의 세 자녀의 삶은 1990년대 한국 사회 빈곤 재생산을 보여주는 또 다른 표본”이라고 말했다.

“공고를 졸업한 큰 손자 영주(39)는 공장일, 신문 배달, 암표 장사. 자동차정비업, 인쇄소, 체육관 사범, 건설노동자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 외환위기 때는 이마저도 없어 도장 파기, 오토바이 배달서비스를 전전했다. 지금은 노동일을 하는데 구청 미화원이 꿈이다.”

조 교수는 그의 삶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세계화의 직접적 영향권 안에 있음을 절감했다”고 한다. 일자리와 임금이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라 소득 수준은 더 내려갈 수밖에 없고 결혼 상대를 찾는 일마저 세계화의 영역에 들어가 빈곤층 남자들은 ‘다문화’라는 또 다른 빈곤문화를 추가한다는 것. 실제로 정 할머니 가족의 경우 아들, 손자 2대가 다문화가정이다.

조 교수는 또 “손녀 은주(36)의 삶은 가난하게 태어난 여성들이 어떻게 빈곤재생산의 희생자가 되는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은주 씨는 다방에서 만난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토스트 장사, 붕어빵 계란빵 장사, 길바닥 옷 장사 등 안 해 본 장사가 없다. 유산할 돈이 없어 미루다가 둘째를 낳더니 저출산이 화두가 되면서 셋째 출산 지원이 되자 셋째까지 낳았다. 남편이 날염 공장에 다니지만 1년의 절반을 노는 직업이라 봉투 붙이는 일, 밤 까는 일. 미싱 일 등을 닥치는 대로 한다. 최근엔 3일에 한 번씩 밤을 새우는 공장에 취직했는데 한 달 수입은 44만 원이다.”

한편 막내손자 덕주(33)의 삶은 빈곤층에서 비행 청소년이 양산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중학교를 2학년에 중퇴하고 남의 집도 털고 본드도 흡입하고 조폭에 들어가 빚을 대신 받아주다 적성에 안맞아 그만두었다. 어렵사리 그 세계에서 벗어났다. 뭔가 되어보려고 연기학원에 다닌 적도 있고 권투로 성공해보려고 권투도장에도 다녔고 중국집 배달, 술집 웨이터. 피시(PC)방 아르바이트 등 안해본 것이 없다. 길가에 서 있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붙잡혀 소년원에 갔는데 이후 사회봉사명령을 어겨 재범이 됐다. 가난한 동네 아이들은 덕주 씨처럼 재범, 3범이 쉬웠다.”

“사당동과 상계동 빈민의 삶은 어떻게 변했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조 교수는 얼마 전 경찰서에서 전화를 걸어온 은주 씨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전 대부업체로부터 300만 원을 빌렸다고 자랑하더니 그게 화근이었다. 월 이자 9만 원을 못내 이자가 눈덩이처럼 커져 고민하다가 누가 통장만 만들어주면 1000만 원을 월 10만 원에 빌려준다 해서 바로 통장을 만들어 보냈다. 은주 씨는 다음날 경찰서로부터 대포통장 명의를 빌려준 혐의로 출두명령을 받은 거였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물질적 빈곤은 자기존중감 같은 정신적 빈곤을 동반한다”고 했는데 조 교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사당동 상계동 사람들로부터 수시로 들은 말이 ‘가진 거라고는 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맨몸뿐 아니라 돈만 쥘 수 있다면 주민번호도 팔았다. 이들이 노동 빼고 돈을 만질 수 있는 일은 노름, 외상, 빚이었다. 사당동 사람들은 수시로 고스톱을 쳤는데 이는 또 다른 돈벌이였다. 이게 상계동 손자대에 와서는 복권으로 바뀐다. 또 사당동에서 일수나 계였던 것이 상계동에서는 카드깡, 러시앤캐쉬(대부업체 이름), 대포차, 대포폰으로 바뀐다. 맨몸뿐인 젊은 빈곤층들은 성형수술에도 집착하는데 생존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지난 25년간 빈민들의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됐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직격탄을 맞은 사람이 현재 도시빈민들이다. 옛날 사당동 사람들이 꿈꿀 수 있었던 가게 주인은 지금 상계동 사람들에겐 어림없다. 쌀가게 구멍가게 연탄가게 이불가게 떡집 미장원은 체인화됐다. 노점상마저 여의치 않다. 상계동 아파트 노점상들도 백화점과 마트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며 “옛날엔 너나없이 못살았던 시절이어서 특정한 ‘빈곤문화’라는 게 없었지만 이제는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이 도저히 소통할 수 없는 ‘빈곤문화’가 존재한다”고 했다.

“상계동 임대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지하 셋방이나 임대 아파트 외에는 다른 경험이 없다. 중산층이 사는 아파트나 단독주택은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다고 말한다. ‘장점’이나 ‘성실’같은 일상적 단어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흔히 알코올 중독에 절제가 없고 게으르고 심지어 성적으로 문란한 것 등을 빈곤문화라고 하는데 내가 지켜본 결과 그것은 빈곤의 원인이 아니라 빈곤의 결과였다.”

지난해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빈곤층은 5가구당 1가구꼴(20.9%)인 352만 가구, 922만 명이나 된다. 이때 빈곤층은 중간소득(월 363만 원)의 절반도 못 버는 이른바 정 할머니네 가족 같은 ‘워킹 푸어(working poor)’다. 이 중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생활보조를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는 160만 명으로 나머지 900만 명에 달하는 ‘워킹 푸어’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우리나라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0.6%)의 2배나 된다.

“(빈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조 교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내 영역 밖”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 사회가 아파할 수 있다면 그것도 그 사회의 능력이다. 동료 교수가 내 책을 읽고 짜장면 배달부를 더이상 경계할 대상이 아닌, 누구네 집 셋째 손주로 여기게 됐다고 했다. 그처럼 빈민층을 대상이 아닌 이웃으로 바라보게 되는 일이 바로 내가 바라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연구가 지난 25년간의 과거에 가난에 대한 기록을 적은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향후 우리 사회 ‘빈곤의 미래’에 대한 모습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조 교수와의 인터뷰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 거리에서 만나는 떡볶이 노점상, 택배원, 오토바이 배달부들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됐다. 새삼 기자를 포함해 이른바 ‘먹고살 만한 사람’들의 관심에서 그들은 무관심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 양극화 논의는 단순히 불균등을 해소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빈곤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우리 이웃에 같이 살고 있다는 깨달음을 갖는 것부터가 아닐까.

[채널A 영상] 직장이 있어도 가난…빈곤층 늘어나는 ‘푸어 전성시대’

● 조은 교수는…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신문대학원에서 신문학 석사, 미국 하와이대에서 사회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급과 불평등’ ‘문화사회학’ ‘영상사회학’ ‘여성학’ 등의 과목을 맡아 왔다. ‘절반의 경험, 절반의 목소리’(1996) ‘도시빈민의 삶과 공간’(1991) ‘성 해방과 성정치’(2002) ‘동아시아의 전쟁과 사회’(공저·2009) 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으며 6·25전쟁을 여성들의 가족사 체험으로 재구성한 ‘침묵으로 지은 집’이란 소설을 내기도 했다. 대안문화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이사장,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 이사장, 한국여성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빈곤#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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