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 3년 한국 분단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최대 관심사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광복 후에 이르는 수년간 세계와 동북아의 역사가 얼마나 뒤엉켰기에 한반도가 분단됐는지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많은 ‘역사의 가정’이 존재하고 한반도 분단이 역사적 우연에 좌우되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만약 미국이 1, 2개월 빨리 원자폭탄을 완성했다면’ 하는 역사의 가정이다. 그러면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유럽에 배치한 병력을 극동으로 옮길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소련군이 동북아에서 참전하기 전에 일본과의 전쟁이 끝났다면 한반도 분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실제로 미국 뉴멕시코 주의 사막에서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날짜는 포츠담 회담 개최 전날, 즉 1945년 7월 16일이었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은 이틀 후인 18일의 일기에 ‘소련이 개입하기 이전에 일본은 손을 들 것이다. 맨해튼(원자폭탄)이 본토 상공에 나타나면 일본은 확실히 항복한다’고 썼다. 그러나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히로시마(廣島)에 투하되자 소련은 참전 계획을 앞당겨 8월 9일에 만주 침공 작전을 개시했다.
미국은 최초의 원자폭탄을 소련이 참전 준비를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투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폭 투하를 1개월 먼저 했으면 트루먼 전 대통령과 제임스 번스 전 국무장관이 기대한 것처럼 일본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항복했을 것이다.
‘만약 원자폭탄 개발이 1, 2개월 늦어졌다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1945년 6월에 작성된 소련군의 기본 작전계획에 따르면 소련군은 만주를 침공한 후 창춘(長春) 지린(吉林)을 점령하고, 제2단계로 9월 초 랴오둥(遼東) 반도의 뤼순(旅順)과 한반도 서울을 향해 진격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미군은 일본 규슈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는 소련군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포츠담 회담 개최 이후 7월 24일 원폭실험의 성공을 알게 된 스탈린은 서울 진격을 단념했다. 그 후 미소 참모총장 회담에서 암묵적인 양해로 미소의 작전 예정 구역은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로 양분됐다.
7월 중순 이후 미국 맥아더 사령부는 ‘블랙리스트’ 작전, 즉 ‘일본의 갑작스러운 붕괴 없는 항복’ 작전에 따라 한반도의 3∼6개 전략지역을 3단계로 점령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군이 점령하기로 한 곳은 서울, 부산, 군산 및 전주 등이고, 북한 지역은 소련군에 맡겼다.
그 시점에 38선에 따른 분할 점령이 합의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것처럼 일본이 8월 10일 연합군에 항복 의사를 전달한 후부터 일반명령 제1호가 작성됐다. 38선 설정을 포함한 초안은 8월 14일 완성됐고, 다음 날 트루먼 전 대통령의 승인을 얻었다.
여기에서도 역사의 가정 하나가 존재할 수 있다. 일반명령 제1호를 만드는 과정에서 미 해군 가드너 제독은 두 차례에 걸쳐 미소 양국 군의 경계선을 39도선까지 밀어 올리자고 강하게 요구했다. 가드너는 포츠담에서 미소 참모총장 회담에 출석했고, 소련 측의 최소한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39도선이 제안되었다면 스탈린은 받아들였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39도선은 평양과 원산을 연결하고 청진, 함흥 등 부동항을 확보할 수 있는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만약 스탈린이 응하지 않았다면 미 해군과 공병대가 소련군에 앞서 남포와 평양을 점령했을 것이다.
만약 이 역사의 가정이 실현되었으면 6·25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김일성이라도 39도선 이북의 지역에 기지를 건설하고 대남 해방의 힘을 비축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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