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이 유로 2012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유럽 축구계를 평정한 2일 밤. 이날도 그는 여름밤 숲길 산책에 나섰다. 스페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민용태 고려대 명예교수(69)는 2008년 교단에서 은퇴한 이후 숲을 찾아 하루도 빠짐없이 2시간씩 걷고 있다.
고교 시절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할 꿈을 꾸던 민 교수는 우연히 친구 따라 스페인어 문학 강좌에 갔다가 스페인 문학에 반해 무작정 한국외국어대 서반어문학과로 진학했다. 이렇게 41년 전 시작된 스페인과 그의 인연을 2일 오후 서울 강동구 길동 일자산에 조성된 ‘강동그린웨이’를 걸으며 들어봤다.
○ 산과 시가 유일한 위안
길었던 가뭄 끝에 내린 단비 덕분에 강동구가 조성한 강동그린웨이 곳곳에는 물기를 머금은 풀과 나무들이 주변을 오가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도심에서 쉽게 보기 힘든 부들과 연꽃, 꽃창포 등 울긋불긋한 꽃과 풀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산책로를 걸으며 매일 보는 나무들과 인사도 하고 만져주기도 하면서 서로 기운을 나누는 거야. 요샌 그게 내 유일한 위안이지.”
편한 운동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민 교수가 저녁식사를 끝내고 산책을 시작하면서 나무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자 하늘이 노란색에서 검푸르게 변해갔다. 민 교수는 교단에서 은퇴한 뒤 산에서 영감을 얻으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봄부터 산길 따라 피어 있던 진달래와 찔레꽃, 산딸기, 옻나무를 떠올리며 이날도 ‘파란 마법의 성’이라는 제목의 시를 즉석에서 써 내려가기도 했다.
그는 대학을 마칠 무렵인 1968년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를 설득해 전 재산이었던 논 8마지기 중에 3마지기를 팔아 스페인행 비행기 삯을 마련했다. 아버지는 외국으로 나가는 아들을 위해 소 2마리까지 팔았다. 그해 25세의 나이로 창작과비평 겨울호를 통해 등단한 민 교수는 스페인에 건너간 지 2년 만에 스페인어로 쓴 시 ‘우화’를 통해 마차도문학상을 탔다. 당시 익명으로 작품을 제출하게 돼 있던 터라 심사위원들도 상을 받으러 온 작가 ‘살라만카’가 동양인 민 교수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후로 그는 지금까지 스페인어 시집을 6권이나 내고 수백 편의 시를 써왔다. 2009년에는 스페인 왕립 한림원 종신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 숲과 함께 여름밤 나기
이날 민 교수와 동행한 숲해설사 이형옥 씨(47·여)는 자귀나무 꽃을 가리키며 “공작 털처럼 생긴 꽃잎이 밤에는 살포시 포개졌다가 낮에는 다시 둘로 떨어진다”며 “그런 특성 때문에 신혼부부의 베개 안에 말린 자귀나무 꽃잎을 넣어 향을 맡게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숲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야간 숲길을 산책하고 싶다면 매주 금·토 오후 7시 반부터 2시간씩 무료로 운영되는 ‘야간 숲길여행’에 참여하면 된다. 8월 31일까지 운영되며 유치원생부터 성인까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매주 둘째, 넷째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운영되는 ‘숲 이야기가 있는 그린웨이 걷기’ 프로그램도 있다. 두 프로그램 모두 강동구 푸른도시과(02-480-1395)로 신청하면 된다.
민 교수는 자연이야말로 우리 삶에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자연은 낙관주의자야. 늘 웃고 있잖아. 우리도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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