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몸담고 있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법률구조기관이다.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법을 잘 몰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법률상담부터 필요한 경우 소송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곳이다. 지금이야 ‘복지’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지만 6·25전쟁 직후인 1956년, 말 그대로 먹고 사는 것의 문제가 관건이던 당시에 법과 양성평등, 인권, 가정의 복리를 위해 무료 법률상담을 시작한 것은 참으로 획기적이며 선구자적인 일이었다. 이러한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구성원이 되고, 평생을 보내게 된 것은 나에게 운명이며 행운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진행 중이던 1960년대 중반 법과대학에 진학했다. 미국 링컨 대통령의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았던 어린 시절, 법을 공부하여 어려운 이들을 돕겠다는 꿈을 가졌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내게 있어 ‘법’이란 ‘정의구현’의 다른 표현으로 억울하고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일지라도 법이 그를 구제해 줄 것이라는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법을 공부하고 평생을 법률구조 기관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주어진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있게 한 그 사람’은 모두 상담소와 관련되어 있다.
무엇보다 상담소의 창설자이자 나를 상담소로 불러주신 이태영 선생님이 계신다. 법과대학의 스승이었던 이태영 선생님의 부르심에 나는 다니던 직장에 미련 없이 사표를 쓰고 상담소로 자리를 옮겼고, 그 자리가 내 평생의 모든 것이 되었다.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모든 일에 임하셨고 상담소의 사업을 위해 때로 혹독하다고 느껴질 만큼 직원들을 밀어붙이셨지만 법률구조 사업에 대한 선생님의 신념과 헌신은 반세기의 역사를 넘어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법률구조사업, 가족법개정운동, 획기적인 사회교육사업의 기틀이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나를 있게 한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이태영 선생님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이 흘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법률구조 사업의 본질, 상담소의 역할 등은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었지만 사회 전반이 변화, 성장하였고 상담소의 위상도 달라졌다. 법률구조 사업의 중요성과 상담소의 역사를 생각하면 상담소의 소장은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이 요구되는 자리다. 창설 60주년을 바라보는 상담소의 역사를 돌아보면 굽이굽이마다 풀어야 할 문제, 넘어야 할 어려움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상담소의 모든 구성원들이 마음과 힘을 합해 과제를 풀어왔지만, 여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회 각계각층의 어른들이 또한 나를 있게 한 분들이다. 사실 나는 사교적인 면이나 친화력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의례적인 인사말 같은 것도 서투르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알아보아 준 사람들이 있었다. 상담소와 관련된 일에 대해 아무런 대가 없이 최선을 다해 도와주신 분들이다. 때로 물질적인 도움도 있고 상담소와 사업과 관련해 편의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그분들이 나를 개인적으로 도와 준 것이 아니라 상담소에 몸담고 일하고 있는 나를 내 그릇보다 높이 평가해 준 덕택이었고 그것은 상담소에 대한 신뢰가 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분들의 도움은 궁극적으로는 법률구조 사업의 정착과 확산에 도움이 되었으며 나아가 우리 사회의 번민하는 이웃들과 어려운 처지에 놓인 가정, 그 가정 구성원들의 복리에 대한 기여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결정적인 그들이 있다. 오늘도 상담소의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우리 내담자들이다. 40여 년의 세월 동안 내 작은 상담실에서 마주 한 내담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때로 같이 한숨을 쉬고 질책 아닌 질책도 해 보고, 안타까워하며 함께 해결방안을 모색해 온 수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있기에 상담소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내담자들과 더불어 성장해 왔다. 이들의 사연 속에서 이들과 함께 나는 한 사람의 인격으로 다듬어졌고 때로 그들은 반면교사로 나를 성숙하게 하였다. 상담소의 작은 방에서 나는 내담자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가정을 들여다보고, 사회의 변화를 읽어내고 상담소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 왔다.
오늘도 아침 회의를 마치고 내담자와 마주 앉아 하루를 시작하며, 상담소와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순수한 사랑과 도움을 베풀어주신 그 모든 이들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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