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정부 총지출 중 법에 따라 반드시 써야 하는 의무지출이 전체의 44.8%인 136조5000억 원으로 늘었다. 의무지출은 보육비, 4대 공적연금 지원같이 법으로 지출 대상과 규모가 규정된 지출과 이자를 말한다. 법이 바뀌지 않는 한 꼬박꼬박 나가야 하고, 경기가 나빠지고 세수가 부족해도 함부로 줄일 수 없는 돈이다. 정부가 사업 규모나 대상을 줄일 수 있는 재량 지출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의무지출이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연평균 8.3% 증가했다. 국내총생산(GDP)과 총지출 증가율이 각각 6.1%, 6.3%인 것과 비교하면 의무지출의 상승세가 가파르다. 고령화로 연금 수요가 늘었고, 무상보육 등 복지예산이 증가한 탓이다. 사회복지 의무지출과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의무지출은 같은 기간 각각 15.2%, 11% 증가했다.
의무지출은 정부 재정을 경직화해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만나면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워진다. 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같은 남유럽 국가가 산 증인이다. 지하경제 규모가 커 세입 기반이 취약한 데다 사회복지 씀씀이는 헤퍼 곳간이 바닥을 드러냈다. 유로존 국가 중 사회보장 지출 증가세가 가장 빠른 국가가 그리스와 포르투갈이었다. 외국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 국가 부도의 위기에서도 의무지출에 발목이 잡혀 구조조정을 위한 허리띠를 졸라매지 못한다.
한국의 사회보장 지출 비중은 아직 유럽의 절반 정도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복지지출 증가세가 급격해 이 비중이 몇 년 내에 그리스 수준으로 높아질 수도 있다. 한국의 지하경제는 GDP 대비 20∼30%로 남유럽 국가 수준이다. 사회 곳곳에서 복지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 고령화로 자연적으로 증가하는 연금 부담도 만만치 않다.
정치권이 대통령 선거의 표만 의식해 곳간 자물쇠를 푸는 데만 열중하면 남유럽의 전철(前轍)을 뒤따라가기 쉽다. 기획재정부는 정치권이 내건 4·11총선 공약을 이행하자면 향후 5년간 268조 원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밝혔다. 대선을 앞두고 각종 복지공약이 쏟아지면 재정 부담이 더 커질 것이다. 공약의 뒷감당이 쉽지 않아 보인다. 세수를 늘려 재정건전성 악화를 막으려고 해도 재정의 손발이 묶이면 손쓸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