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는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잦은 전쟁과 혁명으로 불안해진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이 1815년 국제조약에 의해 영세중립을 보장받은 스위스의 은행에 돈을 맡기기 시작했다. 스위스 은행들은 고객 특성에 맞춰 ‘비밀주의’를 핵심 영업전략으로 삼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가 세금 확보를 위해 스위스 은행 계좌에 관심을 보였고 1933년 집권한 독일의 히틀러까지 유대인 계좌에 눈독을 들였다. 깜짝 놀란 스위스는 이듬해 은행의 비밀 준수를 의무화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나치 권력자들은 역발상을 해냈다. 유대인으로부터 약탈한 재산을 스위스 은행에 맡긴 것이다. 유대인과 나치 모두가 스위스 은행의 고객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스위스 은행의 고객층은 훨씬 넓어졌다.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난 신생국의 독재자나 기업화한 각국 범죄조직의 검은 자금이 스위스로 몰려왔다. ‘검은돈의 천국’이라는 오명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다. 하지만 검은돈을 끌어들이는 영업방식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거세지자 철옹성 같은 비밀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2009년 스위스의 최대은행 UBS를 상대로 이 은행에 비밀계좌를 둔 미국인 탈세 혐의자 5만2000여 명의 명단 제출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스위스 정부가 나서서 협상했고 4000여 명의 정보가 넘어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스위스를 ‘조세도피처 회색국가군’에 포함시키자 스위스는 ‘OECD가 요구하는 기준의 조세협약’을 여러 나라와 맺는 방식으로 회색국가에서 벗어났다. 한국과 스위스 정부가 조세조약을 개정해 25일부터 한국인 탈세자들의 스위스 계좌를 볼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국세청은 해외에 세운 페이퍼컴퍼니를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 스위스 은행에 맡긴 기업인 A 씨를 2010년 적발해 2137억 원의 세금을 추징했다. ‘역외탈세추적 전담센터’를 설치해 6개월의 조사를 벌인 끝에 올린 성과였다. 그 전에는 해외 탈세에는 거의 손을 못 댔다. 정부 관계자는 “수십 년 전에 개설한 계좌라도 2011년 이후까지 유지됐다면 발생한 이자소득에 대해 과세정보를 요청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스위스로 돈을 빼돌린 역대 권력자의 비자금도 밝혀낼 수 있을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