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런저런 공모전이 넘쳐 나지만 수상자만 배출하고 키우지 않는 일회성 행사로 그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조선청년회연합회의 ‘조선물산장려 표어 현상 당선’ 광고(동아일보 1922년 12월 25일)는 많은 것을 암시한다. 경제적 자립을 강조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관련해 당시 동아일보는 ‘경제적 각성을 촉(促)하노라’(1922년 1월 4일), ‘산업 상으로 자립(自立)하라’(1922년 3월 17일) 같은 1면 톱기사로 공공 의제를 설정하고 나섰다.
앞서 나간 현상공모 광고(동아일보 1922년 12월 1일)를 보자. 1등 1인 50원, 2등 2인 15원, 3등 4인 5원의 상금을 걸고 ‘조선 사람은, 조선 것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먹고 닙고(입고) 쓰고 살자’는 내용을 작성하도록 했다. 당선작 발표에서는 1등 없이 2등에 이광수(‘조선 사람, 조선 것’)를 비롯한 세 명, 3등에 서인식(‘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을 비롯한 네 명이었다. 수상자에 문인이자 언론인인 춘원 이광수와 평론가 서인식이 들어 있어 흥미롭다. 공고문을 그대로 썼고 ‘으로’가 있고 없고 외에는 똑같은데, 2등과 3등을 어찌 갈랐을까.
이광수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평론가 서인식은 ‘께오리ㆍ루가츠(게오르그 루카치) 역사문학론 해설’이나 ‘동양문화의 이념과 형태’ 같은 글을 통해 동아시아의 지향점을 모색했던 당대의 지식인. 당선작이 발표된 1922년에 이광수는 30세(1892년생), 서인식은 16세(1906년생)였다. 서인식은 중앙고보 학생이라 응모할 법한데, 1917년부터 ‘무정’을 연재했던 이광수가 왜 응모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심사위원 자격도 넘치는 등단 작가였으니 어색할 수밖에.
현상 공모는 호랑이 새끼 둘을 키워 냈다. 이광수는 Y생이라는 익명으로 1923년 2월에 단편소설 ‘가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1923년 5월 16일 촉탁기자로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니 몇 달 전 수상이 인연의 작은 실마리가 되었으리라. 서인식도 평론을 공부했다. 만약 현상공모가 없었다면 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마찬가지로 요즘 공모전 수상자들 역시 미미해 보이지만 호랑이 새끼일 수 있다. 공모전이 일회성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 수상자의 재능을 계속 키워 주도록 제도 개선이 시급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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