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살면서 세계화 시대를 체감한다. 어디에서나 외국인을 볼 수 있고, 더이상 외국인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없다. 여러 문화권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의외로 갈등이 없는 안정적인 사회라는 느낌이 든다.
주위의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국에 대한 느낌이나 이미지를 물으면 대부분 “살기 좋은 나라”라고 답한다. 빠른 배달 서비스, 24시간 영업 문화, 보편화된 인터넷 서비스에 매력을 느낀다. 정부나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각종 외국어 통역 서비스를 통해 외국인으로서 흔히 겪는 언어 문제도 큰 어려움 없이 해결한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간판, 안내문 등도 한국어와 영어로 제작돼 있다.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영어 안내방송을 들을 수 있다. 편리함을 누리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니 여러모로 좋은 일이다.
편리한 점이 많지만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걱정스러운 점도 있다. 일상에서 한국어 단어를 영어로 바꿔 쓰는 것이 보편화된 일이다. 영어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한국에 살며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문화 중 하나다. 특히 백화점이나 대형 슈퍼마켓 같은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상품 안내를 하며 영어를 많이 쓰는데, 마치 영어로 표현하는 상품이 고급품이고 유행에 앞선다는 인상마저 준다.
백화점에서 옷을 고르며 직원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이 정장은 치마가 한 벌인가요?” “아, 스커트요?” “다른 색깔 있나요?” “어떤 컬러를 찾으시는데요?” “검은색이요.” “아 블랙?” 한글을 쓰는 내가 마치 덜 배운 사람이거나 촌스러운 사람으로 비치는 느낌까지 받았다. 한국어를 배우며 스커트를 치마로, 블랙을 검은색으로 익혔는데 내가 잘못 쓰는 건가 싶기도 하다.
얼마 전엔 공연을 보고 온 친구가 한껏 들떠 말했다. “정말 파워풀한 무대였어! 그 가수의 라이프 스토리를 듣고 공연을 보니까 더 감동적이더라. 명품 바이크를 타고 등장하는데 정말 멋있었어.” 나에겐 어색하게 들렸는데, 같이 있던 한국 친구들은 별 생각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휴대전화가 울리고 문자가 왔다. ‘썸머 바캉스 이벤트’를 알렸다. ‘여름휴가맞이 행사’라고 하면 훨씬 부드럽게 들릴 텐데….
정말 한국인들은 일상에서 외국어, 특히 영어를 많이 쓴다. 학생들을 보면 친구들끼리 영어 단어를 하나 쓸 때마다 벌을 주는 게임도 한다. 그런 게임을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외국어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다. 생큐, 댄스, 컬렉션 등등. 외래어와 외국어의 남용이 특히 심한 곳은 인터넷사이트다. 온라인 창을 띄우면 첫 화면부터 ‘다이어트 이벤트’ ‘쇼핑 트렌드’ ‘추천 포토’ 등 영어와 한국어가 무분별하게 혼용된 문구로 어지럽다. 휴가, 장화, 선택, 바지, 만화 등도 바캉스, 레인부츠, 초이스, 팬츠, 카툰 등으로 대체돼 있다. 이러다가 한국어 단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외국인이 많아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영어가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위상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어로 옮기기 어려운 외래어도 아닌 단어까지 영어로 쓰는 것은 아름다운 한국어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 아닐까? 한국은 주요 20개국(G20)을 비롯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서 세계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동시에 한국어는 외국인들이 배우고 싶은 언어 중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일상 대화조차 외국어를 섞어 쓰고 있다. 한국어의 가치와 본래의 멋이 점점 없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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