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민주통합당 의원이 17일 경쟁 후보들의 요구사항인 결선투표제를 전격 수용하던 순간,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이 떠올랐다. “선수가 룰에 맞춰야지 룰을 바꾸자고 하면 안 된다”는 말로 ‘민주당의 박근혜’란 얘기까지 들었던 문 의원이다. 그냥 버티기만 하면 더 유리한 룰대로 갈 수 있는데 경쟁자들에게 양보한 그의 태도가 놀랍고 신선했다.
민주당은 그날 밤 즉시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해 결선투표제 도입을 확정했다. 선수들이 룰을 조정하고 심판이 받아들이는 프로세스도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 사례다. 그래서 정치를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선수들(여야) 간에 합의가 안 됐다는 이유로 국회법까지 숱하게 어기는 정치인들이, 당내 경선 룰이 뭐 그리 금과옥조라고 일점일획도 못 고친단 말인가.
박근혜 의원도 10일 대선출마 회견에서 필자를 놀라게 했다. “불통(不通)이란 말은 별로 들은 기억이 없다.” 차라리 ‘불통이란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면 몰라도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다고? 언론과 야당, 심지어 여당에서도 그의 불통을 지적해왔는데…. 그럼 박 의원은 신문 방송도 안 보고, 야당에 귀 기울이지 않고, 친박끼리만 어울린다는 얘긴가. 참 심각한 불통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닷새 뒤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 동아일보 여론조사 결과 ‘국민소통과 통합’ 부문에서 박 의원이 37.1%의 지지로 대선주자들 가운데 1위였다. 전혀 예상 밖이었다. 명색이 정치부 기자인데, 국민의 마음을 이렇게 모르고 있었나?
메신저 거부 현상이란 말이 있다. 메시지를 발신하는 사람(메신저)이 불신을 받으면 그가 어떤 메시지를 던져도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불신이 불통을 부른다. 반대로 신뢰받는 메신저의 말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신뢰는 소통을 돕는다. 2004년 총선 직전 박근혜 당시 대표가 영입해 천막당사에서 총선전략을 짜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에게서 들은 말이다.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가 강한 박 의원의 경우는 후자다. 큰 정치적 자산이다.
그러나 그 자산은 독(毒)일 수도 있다. 실제로 소통이 잘 된다기보다 신뢰 이미지 덕에 소통 점수가 착시현상으로 올라갔을 수 있다는 얘기다. 원칙과 신뢰,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신념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자칫 독선으로 흐르기 쉽다. 원칙과 독선은 동전의 양면일 수 있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상대적 개념이다. 자신이 항상 옳고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생각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있다. ‘신념에 가득 찬 훌륭한 지도자가 늘 자기 뜻대로 하는 세상’과 ‘내 신념과는 좀 다르더라도 다수에 양보도 하는 지도자가 있는 세상’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후자를 원한다.
박 의원은 5·16군사정변에 대해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 아쉽다.
2002년 가을,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 대표로 있던 박 의원에게 “도와달라는 정몽준 의원의 요청을 거부한 진짜 이유가 뭡니까”라고 물었다. 대선출마를 선언한 정 의원의 지원 요청을 거절한 직후였다. 박 의원은 단호했다. “아버지를 시해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는 강신옥 변호사를 가까이 하면서 나더러 도와달라는 게 말이 되느냐. 정치를 안 하면 안 했지….”
개인적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이 ‘인간적인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인식에만 머물러선 곤란하다. 박 의원이 되고자 하는 대통령직은 개인사를 넘어 역사를 더 무겁게 생각해야 하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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