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4343년 올해까지 931번이나 침략 받아 평균 4년꼴로 전쟁을 겪은 셈이라는데 1953.7.27 휴전협정 이래 처음으로 57년 동안이나 안전하다는데 내게는 위험이 필요한가? 안전하게 밥 먹고 안전하게 잠자고 안전한 꿈만 꾼다 두통마저 안전해 딱따구리도 두통약 먹을까? 나의 미래는 어디서 오는가?
―유안진 ‘나는 너무 오래 안전한가?’
1967년 10월 21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베트남전쟁 반대시위를 취재하는 중년의 사진기자가 거리를 헤맨다. 해는 기울고 필름도 거의 떨어질 무렵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시위대를 향해 총검을 겨눈 군인들 앞으로 꽃을 든 여인이 성큼 다가서는 것 아닌가. 순간 그의 손가락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이 한 장의 흑백사진은 반전 평화시위의 상징으로 사진의 역사에 기록된다. 지금 서울에서 회고전이 열리는 프랑스 사진가 마르크 리부 씨(89)의 대표작 ‘꽃을 든 여인’이다. 긴장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사진은 그에게 로버트 카파의 현장감과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서정성 등 포토저널리즘 거장들의 미덕을 계승한 작가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번 주에 미술행사를 취재하러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에 다녀왔다. 강원 철원의 안보관광 코스를 도는 동안 전쟁과 평화 사이 어디쯤에 위치할 우리의 분단 현실과 워싱턴의 그 사진이 겹쳐지는 느낌이었다. 꽃다운 청춘인 무장 군인들의 긴장과 무성한 초목들의 적막한 평온이 어우러진 우리의 산하는 극과 극을 대비한 사진처럼 시야를 메웠다. 너무 사실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인가. 경원선과 금강산선이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서울역 다음으로 많은 직원이 근무했던 한때의 기차역이, 2600명의 학생들로 붐볐던 공립보통학교가 흔적 없이 증발한 도시. 철원은 서울에서 불과 104km 거리에 있었다.
전쟁이 파괴한 삶의 붕괴를 초여름 길바닥에서 온 몸으로 겪어낸 세대와, 모니터 앞에서 ‘멘털붕괴’를 외치며 전쟁게임으로 여름을 나는 세대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는 듯하다. 가까운 자기 현대사의 참극을 아득한 남의 일처럼 여기는 집단 기억상실증이 퍼져간다. 군사분계선을 코앞에 두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전쟁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사는지 깨닫는 순간, 유안진 시인의 작품이 생각났다.
지구상에서 보기 드물게 특이하고 복잡하고 그만큼 처참했던 전쟁 하나가 이 땅을 휩쓸고, 더 망가질 무엇도 남아있지 않을 때쯤 돼서 휴전을 맞은 지 올해로 59년째. 시인이 역사가는 아니지만 시의 셈법에 따르면 거의 올림픽 주기로 이 땅을 덮친 전쟁의 비열한 야만으로부터 해방돼 모처럼 긴 휴지기(休止期)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한데 그 평화의 표면 아래 감지되는 불온한 공기를 시인은 느끼나 보다. 시인은 원래 예언자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시는 오래된 안전에 취한 몽롱한 의식을 꼬집어 깨운다.
철원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1975년 발견된 북한 남침용 땅굴이었다. 지하의 음습한 냉기가 흐르는 벽에 걸린 문구 하나가 가슴을 쿵 때린다. ‘자기의 조국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 굴을 벗어나 마주한 한여름 햇살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들어갈 때 지나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정전 21567’.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멈춘 날을 헤아리는 숫자였다. 지금 우리는 안전한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