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물동이 두 개를 물지게에 지고 물을 날랐다. 오른쪽 물동이는 집에 도착해도 물이 가득 차 있었지만, 왼쪽 물동이는 금이 가 물이 새는 바람에 물이 반도 차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는 늘 물이 새는 물동이로 물을 날랐다.
이를 보다 못한 마을 어른이 하루는 남자에게 점잖게 충고했다.
“이보게, 자넨 어째 물이 새는 물동이로 물을 긷는가. 이제 그만 그 물동이는 버릴 때가 되었네.”
남자가 웃으면서 마을 어른께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 물동이는 물이 새지만 아주 소중합니다. 저길 한번 보십시오. 제가 물지게를 지고 온 길 왼쪽엔 항상 꽃과 풀들이 자라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기 오른쪽 땅은 먼지가 폴폴 일고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습니다. 비록 물동이가 금이 가 물이 새지만, 그 물이 메마른 땅을 적셔 풀꽃을 자라게 하니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금이 가 물이 새는 물동이는 물 긷는 물동이로서는 이미 그 가치가 상실된 존재다. 계속 물을 길으려면 물이 새는 물동이는 버리고 새 물동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물동이 주인은 그런 물동이도 어딘가에 쓸모가 있다고 생각하고 버리지 않는다.
이는 물 긷는 물동이가 물이 새면 더는 쓸모가 없으므로 버려야 한다는 평균적 가치관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만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일 더이상 물 긷는 데 가치가 없다고 물이 새는 물동이를 버렸다면 길가에 아름다운 풀꽃들은 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물이 새는 물동이의 숨은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꽃을 피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숨은 가치 발견할때 세상 아름다워
내 인생의 물동이도 금 간 물동이다. 세상이라는 우물가에 가서 물을 가득 긷고 집에 와보면 언제 물이 샜는지 물동이에 물이 반도 차 있지 않다. 애써 금 간 곳을 때우고 물을 길어도 그때뿐이다. 그래도 나는 내 물동이를 버리지 않는다. 물이 뚝뚝 샌다 할지라도 어디 좋은 데 쓰일 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우화의 물동이처럼 언젠가는 세상의 마른 길가에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축 처진 어깨에 힘이 솟는다.
만일 내가 물 새는 물동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평균적 가치관에 머물러 있다면 내 인생의 물동이를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런 보편적 가치에서 벗어나 나만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면 버릴 까닭이 없어지고 여전히 물동이로서의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이 시대를 사는 한 시인으로서 내가 평균적 가치관에 의존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시인은 조금 외롭다 할지라도 평균적 가치관에 저항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지녀야 한다.
19대 국회의원이 된 도종환 시인의 의원회관으로 ‘근조’ 리본이 달린 화분이 전달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잡지에 그가 쓴 글에서 읽고 나는 이 ‘물 새는 물동이’ 우화가 떠올랐다. 그의 글에 따르면 “평소 가까이 지내던 분이 내가 국회에 들어와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땅에 아까운 시인 하나 죽었다’라며 흰 천에 검은 글씨로 ‘근조’라고 쓴 화분을 보냈다”고 한다.
나는 그 사람이 근조 화분을 보낼 만큼 도종환 시인을 염려하고 사랑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지니면서, 그 또한 시인에 대한 평균적 가치관에 고형화돼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물 새는 물동이로는 더이상 물을 긷지 말라고 충고한 우화 속의 마을 노인을 연상시킨다.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면 시를 못 쓴다. 따라서 시인으로서는 죽음을 맞이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평균적 가치관이다. 그는 그런 가치관만이 진정한 가치라는 신념하에 도종환 시인에게 근조 화분까지 보내는 행동을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과연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면 시를 쓸 수 없는 것인가. 아니다. 시인은 국회의장이 되어도, 대통령이 되어도 시를 쓸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인 자신의 영혼의 문제지 평균적 가치관에 의존할 문제가 아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 글에서 “나는 그 화분을 책상 옆에 내려놓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분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나는 이미 죽은 건지도 모릅니다. 시 쓰는 사람이 혼탁한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그 자체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평균적 가치관으론 세상 못바꿔
나는 도종환 시인이 근조 화분에 물을 주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까 이제 시를 못 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길 바란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이나 되고 난 뒤나, 또 국회의원을 그만둔 뒤에도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에게 시인으로서의 죽음은 없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든 근조 화분을 받을 까닭이 없다.
요절한 왼손잡이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는 “왼손이 심장과 가까우니까 악수는 왼손으로 하자”고 말했다. 악수는 오른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되지만 왼손으로 해도 그 가치가 손상되지 않는다. 평균적 가치관이 세상을 유지시킬 수는 있지만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물 새는 물동이가 세상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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