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한 가지로 통해 있다. 보인 만큼 느끼고 아는 만큼 이해하게 된다. 요즘 나는 사찰음식을 강의하면서 세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어떤 생물이든 세포가 있어서 생명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 신체의 일부이지만, 세포의 활동에 의해 삶과 죽음이 갈라진다. 어차피 죽음의 순간은 찾아오는 것. 마치 나를 데리러 온 동행자처럼 대하며 따라나설 수 있는 준비가 늘 필요하다고 본다.
어떤 이는 밭을 갈다가 따라나서기도 하고, 음식을 먹다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재수 없게도 떠밀려온 흙더미에 묻혀 그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지난해 여름 우면산 산사태로 딸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멘토를 하면서 모정의 슬픔을 절절히 보았다. 그렇게 준비 없이 따라나서야 하는 생사의 길을 수없이 겪고 있다.
때를 알고 자발적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황망하게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낚아 채이듯이 따라나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것처럼’ 살다가 떠나갈 수 있는 호젓함을 지녀야 하지 않겠나 싶다.
이런 상황이 내게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손바닥과 손등은 내 신체의 일부이지만 역할은 다르듯 우리 생사의 모습은 마치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와 같다. 영원히 사는 법을 깨닫지 못하면 살아있는 듯, 죽은 듯한 모습만 되풀이하고 만다.
‘죽기 전에 이것만은’이란 사실 계속 진행되는 상황에서 급하게 해결하고 싶은 조급함이 만들어 내는 허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 욕망의 한 가지 모양을 띠고 있다. 태어나서 너무 많은 일을 겪고 이루어 내야 하는 공정의 기계처럼 우리는 길들이기에 바쁘다.
아직 이루고 싶은 욕망의 그늘을 키우기보다 이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자신의 성찰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다. 하되 한 바가 없고, 보되 본 바가 없고, 이루되 이룬 바가 없는 무념의 도리 속에서 매 순간 텅 하니 비어 있어야 한다.
나는 출가 후 질병의 원인을 들여다보며 한방공부를 8년 동안 해왔다. 질병은 약을 쓰기 전에 음식으로 다스려야 하기에 바른 식생활을 실천할 수 있는 사찰음식으로 건강해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왔다. 육식을 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지키는 일이 어느 집단이나 한정된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하는 덕목이라고 본다.
나는 아름다운 지구를 만들기 위해 돈벌이 수단의 사육과 잉여의 생산물로 지구가 쓰레기장으로 변하는 모습을 막아내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갈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다시 태어나서 살게 될 지구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은 수심결(修心訣·마음 닦는 길)에서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으려 하는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고 했다.
지구에 생물이 살기 시작한 20억 년 동안 수많은 질병과 재해로 이미 토양이 병들고 물이 오염되고 바람마저도 신선함을 잃고 있다. 우리는 토양의 오염에 따라 질병의 흔적을 이미 지니고 태어난다.
유전적으로 각종 질병의 인자를 가지고 태어나서 환경의 요소에 따라 수많은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자신의 마음 관리, 몸 관리를 소홀히 한 탓이다. 세상의 수많은 생명체가 서로 도우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해치지 않는 마음도리를 가지도록 먼저 동물을 먹는 행위부터 끊어야 한다.
동물도 우리와 똑같이 신경세포를 지니고 있다. 원한을 가지면 반드시 갚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동물적 특성이다. 그동안 허명을 날리며 사찰음식을 알려왔다. 사찰음식을 통해 생명의 존엄성이 왜 필요한지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들여다볼 수 있도록 거울의 역할을 해왔다. 공존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기 위해 인간의 성품이 날카롭지 않도록 매일 자비심의 명상을 할 수 있고, 식물을 이용해서 다양한 식욕을 채울 수 있는 일을 위해 생명의 학교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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