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오늘, 능소화 뚝뚝 떨어지던 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리고 김 전 대통령이 연이어 세상과 작별한 그해에 나는 한 시대가 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살아 보면 산 게 없는 세상, 죽어 보면 죽은 것도 없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도 나는 사복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원효 스님이 했다는 법문을 명문으로 느낍니다. “태어나지 마라, 죽는 게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는 게 괴롭다.”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으니 삶과 죽음은 붙어 있는 거지요?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습니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던 날의 대화록입니다. 독배를 마셔야 했던 그날 아침, 옥리가 들어와 소크라테스 발목을 옥죄던 사슬을 풀어 줍니다. 사슬이 풀리는 날이라는 건 죽음의 날이라는 의미지요?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소크라테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제자들 앞에서 사슬이 풀려 시원해진 발목만 응시하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쾌락이란 이상한 거야. 고통과 대립하는 것일 텐데,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 쾌감이 생기는구먼.”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도 모두 동일한 구조를 지녔지요? 꽃이 시들어 추해지는 것은 아름다웠기 때문이고, 옮지 않음으로 질책을 받는 건 옮음의 잣대 때문이 아닙니까? 대화를 통해 제자들은 상반된 모든 것들은 모두 그 반대의 것에서 나왔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 기반 위에서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잠자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의 반대인 것처럼 살아있는 것의 반대는 없을까?”
“죽음입니다.”
살았기 때문에 죽는 거지요? 죽음은 삶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렇다면 삶은 죽음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겠느냐고 소크라테스가 조심스럽게 되묻는 겁니다.
생과 사는, 천국과 지옥처럼 서로 대립하면서도 동시에 서로에 기대어 있습니다. 어둠을 모르고 빛을 알 수 없고, 지옥을 통과하지 않고 천국에 이르는 길이 없듯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배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알겠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소크라테스가 왜 그렇게 평화로웠는지. 그는 죽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파이돈은 그날의 소크라테스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말씀이나 몸가짐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참으로 두려움이 없고 고귀한 최후였습니다.”
독배 앞에서의 고귀한 최후만큼이나 아름다운 최후를 맞은 이가 8월에 태어나 8월에 세상을 뜬 스콧 니어링입니다. 100세가 되던 1883년 8월, 그는 이제 떠나야 할 때라고 스스로 곡기를 끊었습니다. 그러고는 3주 후 8월 24일,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그를 만나 함께 오지에 들어가 평생 자연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온 헬렌 니어링은 내 남편의 죽음은 자연적이고 유기적인 순환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자연 속에서 살다 간 그 부부는 또 자연스럽게 믿었습니다. 죽음은 삶의 모험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육체가 끝나는 것일 뿐이라고. 육체가 끝나면 우리는 또 무엇이 되어 만날까요? ‘천 개의 바람이 되어’란 시가 찡한 것이 그 속에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묘지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난 잠들어 있지 않습니다. 난 천 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나는 빛이 되고, 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피어나는 꽃 속에 있습니다. 나는 곡식 익어 가는 들판이고, 당신의 하늘을 맴도는 새…, 내 묘지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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