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인사이드/김지영]야한 소설 ‘그레이…’를 읽어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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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오피니언팀 기자
김지영 오피니언팀 기자
모든 아줌마도 한때는 소녀였다. 현실에선 미남 아이돌에게, 비현실에선 만화 주인공에게 빠져들었다.

소녀시절 매혹됐던 순정만화 스토리는 뻔하다. 가난하고 평범한 여성이 부유하고 잘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다. 이런 유년 시절의 기억이 평생을 가는 걸까?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야한 소설’인 영국작가 E 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는 아줌마가 많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저 ‘성인 순정만화’ 정도라고 생각했다. ‘엄마들의 포르노’라고들 하던데 야한 이미지가 넘치는 시대에 글이 야하면 얼마나 야할까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소문대로였다. 과연 ‘셌다’.

책에서 남녀 주인공의 성애 묘사는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무엇보다 글 쓰는 동업자로서 놀라는 것은 표현의 디테일이다.

‘그는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잡더니 혀로 배꼽을 핥았고 부드럽게 잘근잘근 물면서 조금씩 엉덩이뼈까지 내려갔다. 그런 후에는 다시 반대편으로 옮겨 가 다시 엉덩이뼈까지 핥았다.’(1권 179쪽) ‘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훨씬 더 깊은 느낌이 들었고 좋았다. 나는 다시 한번 신음했고 그는 일부러 천천히 엉덩이를 돌리며 뒤로 물러났다가 한 박자 쉬고 다시 편안하게 밀고 들어왔다.’(1권 191쪽) ‘내 치마는 기어 올라가 나는 허리 아래로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 되었다. 나는 숨을 헐떡였고 그를 원했다. 그는 내 엉덩이를 잡더니 나를 다시 벽에 밀어붙이며 허벅지 사이의 정점에 키스했다.’(2권 304쪽)

표현 수위만 센 게 아니었다. 주인공 남자의 성적 취향은 상상하는 모든 것을 실행하려는 BDSM(결박·Bondage+훈육·Discipline+SM·사디즘-마조히즘)이었다. 밧줄, 사슬, 눈가리개, 채찍에 기둥마다 수갑과 족쇄가 달린 침대까지….

작가의 현란한 표현은 성애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남자의 사무실에서 그림을 보며 나눈 대화에는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정말 예쁘네요. 평범한 사물(그림)을 특별한 예술의 경지로 올려놓았어요.” 나는 그와 그림 둘 다에 정신이 팔려 중얼거렸다. 그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나를 강렬하게 바라보았다. “동감이에요. 스틸 양.”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1권 17쪽)

여기에 유머러스한 문장도 많았다. ‘그레이…’ 작가는 야한 표현만 갖고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속도감 있는 스토리텔링 감각으로 대중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했던가. 자극적인 성애 장면도 너무 빈번하게 나오니 지루해졌다. 나중엔 나도 여주인공이 읊는 대사와 똑같은 심정이 되었다. ‘그게 무슨 사랑이야 섹스지’(1권 200쪽).

책을 덮으며 문득 언젠가 이런 유의 소설을 읽은 듯한 기시감(데자뷔)이 들었다. 이른바 SM(사디즘-마조히즘)의 ‘사디즘’ 어원이 된 사드 후작의 소설 ‘소돔 120일’이다. 18세기 후반에 나온 이 소설은 폐쇄된 성(城)에서 온갖 변태 행위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소설에 묘사된 구역질날 정도의 엽색 행각들은 소설보다 더 구역질나는 당시 절대 왕정의 부패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레이…’를 덮으며 뭔지 모를 쓸쓸함과 불안감에 휩싸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현대판 세기말적 현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현실은 너무 힘든데 달아나기엔 너무 공고해서 차라리 대리만족하는 욕망으로 도피하고 싶은 심리…. 아줌마들이 ‘그레이’에 열광하는 것은 혹시 피로감 때문이 아닐까.

남자들도 지쳐 있지만 여자들도 지쳐 있다. 여성의 목소리가 어느 시대보다 커진 시대를 살고 있지만 사실 여자들의 내면은 누군가에게 시시때때로 기대고 싶을 정도로 지쳐 가고 있다.

커리어를 가졌다면 일에서 성공해야 하는 동시에 가정에서도 실패해선 안 된다. 전업주부도 그 나름대로 자식들을 키우면서, 남편을 내조하면서 끊임없이 남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다. 현대 여성은 여성 지위 향상이라는 권리를 성취했지만 그를 위해 또 뭔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인가.

‘야동’(야한 동영상)에 빠지는 남자들처럼 현실을 잊고 싶은 오늘날 여성들이 마치 마약처럼, 아편처럼 ‘그레이’에 취하고 싶은 건 아닌지 책을 보며 후끈했던(?) 마음이 이내 차갑게 식어 갔다.

김지영 오피니언팀 기자 kimjy@donga.com
#대중문화 인사이드#김지영#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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