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에나 간다(Good girls go to heaven, bad girls go everywhere).’ 13일 90세로 세상을 떠난 미국 여성잡지 코스모폴리탄(이하 코스모)의 헬렌 걸리 브라운 편집장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착한 여자는 안락한 삶을 살지만 나쁜 여자는 훨씬 많은 선택의 기회를 누리며 산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평생 여성들에게 “나쁜 여자가 돼라”고 설파했다. ‘나쁜 여자는 어디에나 간다’는 자신의 ‘명언’을 2009년 자서전 제목으로 사용했을 정도다.》
브라운이 말하는 ‘나쁜 여자’는 관습에 매이지 않고 돈 명예 사회적 지위 등 남성들이 누리는 특권을 쟁취하는 여성이다. 여성의 성적 매력도 숨길 것이 아니라 적극 이용해야 할 무기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가 편집장을 맡은 32년 동안 ‘코스모’는 여성의 외모와 성적 매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알려 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들로 가득 채워졌다.
73세에 가슴 확대 수술을 받았을 정도로 성형수술 신봉자였던 브라운은 고령에도 뽀얗게 화장한 얼굴로 대담한 의상을 입고 TV 오락 토크쇼에 자주 출연해 ‘섹시한 여성이 되는 법’을 알려 줬다. 여성의 성적 매력을 내세운 브라운 식 ‘섹시 페미니즘’은 그의 이름 ‘헬렌’을 따 ‘헬레니즘(Helenism)’으로 불려 관능적 아름다움을 표현했던 그리스 헬레니즘(Hellenism)을 연상시켰다.
일명 ‘스틸레토(하이힐) 페미니즘’으로 불리는 브라운 식 페미니즘은 정통 여권 운동가들로부터 ‘사이비’라고 배척받았다. 미국 여권 운동을 개척한 베티 프리단은 브라운을 “안티 페미니스트”라 불렀고 코스모 잡지를 가리켜 “유치한 10대 여성의 성적 판타지로 가득하다”고 비꼬았다. 생전에 여성의 지위 향상을 외쳤지만 그의 사후 여권 운동가들에게서 애도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브라운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진보적인 동시에 퇴행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야누스적 인물”이라며 “그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논란이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많은 여성에게 브라운의 주장은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특히 일터에서 매일 남성과 부닥치며 살아가는 직장 여성에게는 여권 운동 같은 고상한 이념보다 남성을 적대시하지 않는 현실적 여성관이 설득력이 있었다.
영화 ‘섹스 앤 더 시티’를 포함해 미국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현대적 여성상은 브라운이 내세운 ‘나쁜 여자’를 모델로 삼은 경우가 많다.
브라운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성공에 대한 열망과 집착은 여기서 비롯됐다. 1922년 아칸소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 때 아버지가 엘리베이터 사고로 사망한 후 로스앤젤레스(LA)로 이사 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LA의 경영단과대학 졸업 후 광고회사 비서로 들어가 톡톡 튀는 광고 문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인정받아 제작 부서로 옮겼다. 여러 광고회사를 거치며 성공 가도를 걷다가 40대 초반이던 1960년대 초 광고계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여성이 됐다.
브라운이 1962년 내놓은 책 ‘섹스와 독신 여성’은 당시 보수적이던 미국 사회에 일대 충격을 안겨 줬다. 책에서 여성에게 성적 자유를 누리며 살라고 주장한 그는 “성공을 위해 섹스를 이용했다”는 자신의 경험담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65년 여성잡지 코스모를 살리라는 특명을 부여받고 미디어그룹 허스트에 영입됐다.
당시 미국의 여성잡지 시장은 전업주부들을 겨냥해 살림과 내조 비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운은 커리어 여성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여성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성공한 독립 여성을 모델로 내세운 기사들에 집중했다. 돈 명예 권위 사랑 등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코스모 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남성이 만든 게임의 규칙을 뒤집기보다 그 안에서 여성이 성공하는 비결을 알려 준 브라운과 코스모 잡지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보수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져 전성기를 누렸다.
브라운은 1983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25인에 선정됐으며 미국의 대표적 오락 토크 프로그램 ‘투나잇 쇼’의 10대 단골손님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그가 처음 편집장을 맡았을 때 발행 부수가 76만 부에 불과했던 코스모는 80년대 초 300만 부로 급증했으며 현재 64개국 판으로 번역 출판되고 있다.
브라운은 겉으로는 성적 자유를 외쳤지만 사생활은 ‘모범생’이었다. 1959년 결혼한 남편 데이비드 브라운(영화 제작자)이 2000년 사망할 때까지 41년간 동고동락하며 살았다. ‘스팅’ ‘조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등 수십 편의 할리우드 영화를 제작한 브라운의 남편은 아내의 사회활동을 지지하며 후원했다. 이들 부부는 “아이들을 낳아 기르기에 우리는 너무 이기적”이라며 평생 자녀를 두지 않았다.
여성의 재정적 독립을 중시했던 브라운은 코스모 편집장으로 재직하던 32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점심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을 정도로 검소했다. 브라운은 남편이 사망한 뒤 남편의 모교인 스탠퍼드대와 컬럼비아대에 남편과 자신의 이름을 딴 미디어연구소 건립에 평생 모은 재산 3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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