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배심제는 헨리 2세가 다스리던 12세기 영국에서 시작됐다. 당시 재판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왕권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왕이 재판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자신의 대리인으로서 재판관을 임명했고, 작은 마을은 재판관이 말을 타고 순회하며 재판을 진행했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한 순회재판관이라도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하루 이틀 만에 파악해 올바로 판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 내 책상도 애플 특허 침해겠네
그래서 재판관은 마을에 도착하면 주민들을 모두 모아, 무작위로 일정한 수의 주민을 뽑은 후,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그들이 일치하여 이야기하는 사실에 법률적 지식을 더하여 판결하곤 했다. 그것이 지금의 배심제로 발전했고 헌법을 제정하면서 권력의 독점을 가장 경계했던 미국 역시 이를 사법제도의 근간으로 삼았다.
배심제에도 많은 장단점이 있지만 그것이 가진 장점이 영미계 법률체계와 잘 어울려 미국의 사법제도로 정착된 것이다. 우리 법원도 수년 전부터 비슷한 제도를 도입해 일부 시범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배심제의 문제점이 자꾸 불거지고 이제는 미국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제법 높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전자와 애플의 소송에서 애플이 일단 완승했다. 최고의 전문가가 완전히 중립적인 위치에서 판정한다 해도 애플이 이길지 모른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자존심’이라는 회사가 코리아의 웬 시건방진 기업과 싸우고 있고, 며칠 전까지 스티브 잡스의 죽음을 애도하던 이 동네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판정한다면? 누구도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공정과 정의’라는 최고의 법익(法益)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훤하지만 순회재판관은 잘 모르는 사안에서 배심원은 고마운 존재다. 권력과 금력에 구부러진 재판부가 현란한 법언(法言)으로 상식을 위협할 때 배심제의 가치는 극대화한다. 하지만 내 친구와 내가 모르는 사람이 다투는 경우라면 내게 판정을 맡겨서는 안 된다. 다툼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맡겨서도 안 된다.
제도경제학 또는 법경제학은 이렇게 가르친다. “신기술은 개발비용이 많이 드는 반면 베끼는 비용은 싸다. 개발자보다는 모방자가 많아진다. 이 때문에 사회가 필요한 만큼 혁신이 이뤄지지 않는다. 시장의 실패다. 이 문제의 해법에는 ①정부가 직접 신기술을 생산하거나 ②민간의 기술개발에 보조금을 주거나 ③정부가 기술을 사서 공개하거나 ④특허제를 통해 개발자에게 배타적 이용권을 주는 방법 등이 있는데 ④가 가장 우월하다”고.
이번 특허판결은 “편평하고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직사각형은 애플만의 독특한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웃긴다. 이 글을 쓰는 내 책상, 내 모니터, 내 자판도 그렇게 생겼는데….
삼성, 최초 개척자로 진짜 승부 내라
특허는 혁신을 촉진하려는 제도다. 그러나 이 판결은 기업이 혁신보다는 소송에, 그것도 우리 편이 판정하는 소송에 더 관심 쏟도록 유도한다. 보호주의에 기대도록 오도한다.
이처럼 제도가 생산성의 발목을 잡고 소비자 편익을 침해할 때 제도경제학의 고뇌는 시작된다. 타 국민과의 소송에서는 ‘내편들기’ 문제가 늘 발생한다. 해법은 너무 쉽다. 중립적인 국제소송기구로 가도록 제도화하는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도 그래서 만들어졌다.
한 가지 더. 세계 정보기술(IT) 패권 경쟁에서 이번은 1라운드다. 삼성은 애플의 디자인과 기술특허를 우회하고, LTE 등에 승부 거는 전략으로 간다고 한다. 기업의 최종 승부처는 법정(法廷) 아닌 시장이다. 삼성이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에서 최초의 개척자(first mover)로 변신할 때 진짜 승부가 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