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에서 어느 공공기관이 이사장을 공모(公募)할 때의 일이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응모자 중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이 있었다. 공공기관 담당자는 그에게 면접 날짜를 통보해주면서 괴로웠다. 청와대가 이미 내정한 사람이 있는지라 ‘왕복 항공료 수백만 원 날리고 면접장에 나와 봐야 당신은 들러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공모 자체가 헝클어지므로 어쩔 수 없이 모른 척했다. 미국 거주자는 희망을 품고 서울에 날아와 열심히 면접을 치렀지만 이사장은 청와대가 내정한 사람이 됐다. 기관장 공모제가 물정 모르는 선량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정부의 사기극(詐欺劇)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여러 공공기관장 공모 사무를 맡았던 정부 부처의 인사담당자는 청와대나 장관이 낙점한 인물이 최종 결정되도록 추천위원들을 상대로 ‘사전 정지(整地)작업’을 하는 것이 임무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추천위원들에게 거수기 또는 바람잡이 역할만 하라는 주문과 회유 공작을 정부가 막후에서 벌인 것이다. 국민을 향해서는 공정(公正)사회 구현에 정권의 명운을 걸겠다고 큰소리치던 정부가 뒤로는 은밀하게 이런 협잡을 한 것이다.
공공기관장 공모제는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기획예산처가 ‘추천제’란 이름으로 처음 도입했지만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노무현 정권도 출범 초기 ‘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낙하산 인사를 뿌리 뽑겠다”고 공언했지만 ‘내정 공모제’ ‘코드 인사’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현 정부 들어서는 주택공사 토지공사 한전 국민연금공단 등 대형 공기업과 연기금을 포함한 90여 기관을 공모제 의무대상 기관으로 확대 지정하면서 ‘투명 인사’를 다짐했지만 ‘짜고 치기’는 여전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 모두 허울 좋은 공모제로 국민을 속였다.
공공기관장 자리를 정권의 전리품(戰利品)처럼 생각하는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사기성 짙은 공모제로 선거캠프 인사를 비롯한 자기 사람들을 낙하산으로 내려 보낸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공공기관 노조는 낙하산을 타고 오는 기관장과 거래를 시도한다. 임명 반대다, 출근 저지다 하며 애를 먹이면 ‘정통성 약한’ 기관장이 뭔가 떡을 내놓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결국 공기업은 경영이 부실해지건 말건, 적자가 쌓이건 말건 갈라먹기의 천국이 되기 십상이다. 이런 야합의 최종 피해자는 국민이다.
이 때문에 “차라리 인사가 잘못되면 책임이라도 물을 수 있는 임명제로 돌아가는 것이 현실적이다”는 의견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정도다. 특히 주택 복지 등 정치적 이념적 색채가 짙은 정책을 수행하는 공공기관의 장은 임명제가 괜찮은 대안이다. 공모제를 유지하려면 정부 정책과의 조화를 고려해 심사해야 한다. 정치색깔이 별로 없는 공기업은 제대로 된 경쟁방식의 공모제로 제도 운영을 혁신해야 한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은 현재 원장 공모가 진행 중이다. 국민연금공단은 금년 12월에 이사장 임기가 끝난다. 이들 자리도 ‘내정 낙하산’이 있는지, 앞으로 몇 달만이라도 제대로 된 공모제를 해볼 것인지 청와대는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여야 대선후보들도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공모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분명한 견해를 내놓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