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생이 되던 무렵인 1976년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최헌의 ‘오동잎’이 히트를 쳤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라디오로만 들을 수 있었고 TV에서는 최헌만 봤다. 내 기억 속에 조용필을 처음 본 것은 1979년 이후다. 조용필이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TV에 나올 수 없었던 4년간은 최헌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1979년 조용필이 ‘창밖의 여자’를 들고 나온 이후 1980년대를 휩쓸기 전까지 남자가수 중에는 그가 최고였다.
▷TV만 틀면 나오던 최헌의 노래가 지겨워지던 1977년 어느날, 하굣길 버스에서 산울림의 ‘아니 벌써’가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그 노래가 너무 좋아서 끝까지 다 듣느라 집 앞에 내리지 못했다. 사실 ‘아니 벌써’는 새로운 게 아니라 새롭게 들렸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이미 1975년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 같은 곡이 히트를 쳤지만 금세 금지곡이 된 그 곡을 듣지 못했다. 최헌 류의 곡을 트로트 고고라고 부른다. 음악평론가 신현준은 ‘한국팝의 고고학 1970’이란 책에서 “1970년대 중반 신중현과 송창식을 좋아하고 1970년대 후반 산울림과 활주로를 좋아한 사람들에게 이런 곡들은 ‘혐오의 대상’ 이상이 아닐 것이다”고 쓰고 있다.
▷최헌은 사실 그룹사운드 보컬 출신이다. 키보이스와 함께 1970년대 초의 대표적 그룹인 히식스에서, 조용필이 이 땅의 넘버원 기타리스트로 꼽은 김홍탁과 함께 활동했다. 음악평론가 강헌에 따르면 히식스는 보컬을 보강하기 위해 보컬과 세컨드 기타를 함께할 수 있는 멤버를 오디션하게 됐다. 리더인 김홍탁은 5명을 후보에 올려놓았다가 최종적으로 2명을 추렸는데 한 명이 최헌이고 또 한 명이 조용필이었다. 조용필은 비음이어서 허스키 보이스인 최헌이 뽑혔다.
▷유신은 가요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진과 나훈아는 1972년 가요 정화(淨化)운동에서 트로트가 왜색으로 몰리면서 TV에서 밀려났다. 그 빈자리를 송창식 등 세시봉 가수들의 포크송이 차지했다. 그룹사운드들은 장발 미니스커트 등 퇴폐풍조 단속에도 불구하고 호텔 고고클럽에서 명맥을 유지했으나 1975년 대마초 단속으로 궤멸됐다. 최헌은 살아남아 솔로로 전향해 성공을 거뒀다. 음악적 평가야 어떠하든 그가 별세한 지금 그 천부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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