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첫 내한 공연을 한 에미넴(40). 세련된 손동작 몸동작을 하며 속사포 랩을 쏟아낸 그에게 국내 팬들은 거센 빗방울 속에서도 ‘떼창’(많은 사람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으로 화답했다. 현존하는 힙합계의 백인 전설로 통하는 에미넴. 미 롤링스톤지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아티스트 100인’에 꼽은 그는 ‘자유분방한 비트와 멜로디의 조화가 독보적인 경지’(롤링스톤), ‘팝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아성’(뉴스위크), ‘현대판 셰익스피어’(영국 BBC)라는 극찬을 받고 있다. 그는 1999년 그래미 어워즈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8장의 음반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려놓았고 그래미상을 11차례 수상했다. 지금까지 판 음반만 9000여만 장. 페이스북에서 ‘좋아요’ 클릭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왜 세계 젊은이들은 에미넴에게 열광하는 걸까? 탁월한 음악성 이전에 철저하게 아웃사이더로 버려졌던 루저 인생이 요즘 젊은이들의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본명이 마셜 브루스 매서스 3세인 그의 삶은 한마디로 ‘어둠’ 그 자체였다. 미국 디트로이트 빈민가에서 태어나 두 살도 안 돼 아버지가 가출하는 바람에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약물중독자여서 생활력이 없었다. 에미넴은 빈민가를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했던 그는 17세에 고교를 중퇴하고 여자 친구(당시 14세)와 동거를 시작한 뒤 21세에 딸을 낳았다. 에미넴의 첫 앨범이 망하자 아내는 딸과 가출해 버렸다. 두 사람은 몇 년 뒤 재결합했지만 1년 만에 다시 헤어지고 결국 이혼한다. 같은 시기 모친이 노랫말에서 아들이 자신을 욕했다며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에미넴은 모친에게 2만5000달러를 합의금으로 내주었다.
에미넴은 한(恨) 많은 인생을 노래에 녹여냈다. 가벼운 농담에서부터 때로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분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반성과 회개가 담긴 가사의 공통점은 그의 삶에서 우러나왔다는 것. 대표적으로 그의 자전적 스토리를 담은 영화 ‘8마일스’의 주제곡 ‘루즈 유어셀프(Lose yourself)’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악착같이 랩에 매진하면서, 인생에 기회는 단 한 번뿐인 것에 대한 불안과 초조함을 솔직하게 담았다. ‘You only get one shot, do not miss your chance to blow. This opportunity comes once in a life time(단 한 번뿐이야.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살면서 이런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오지 않아).’
또 ‘헤일리스 송(Hailie's song)’에 나오는 ‘I love my daughter more than life in itself(내 딸은 내 삶보다 소중해)’는 오른쪽 팔에 대문짝만 하게 딸의 얼굴을 새길 정도로 딸 사랑이 각별한 마음을 담은 것이다. 히트곡 ‘러브 더 웨이 유 라이(Love the way you lie)’는 자신을 때리던 남자 친구에게 다시 돌아가는 여자의 심정을 담아 폭력을 미화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피처링을 맡았던 친한 친구 리애나의 실제 이야기여서 공감을 일으켰다.
에미넴은 이처럼 인생이 잘 안 풀리는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 분노, 소외감, 억눌림, 아버지한테 버림받았던 기억, 어머니 및 아내와의 갈등, 실패, 왕따, 가난 등 어두운 과거와 현재를 노래에 담았다. 때로 세상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느끼는 살인 욕망까지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음악적 탁월함이 없으면 인정받지 못한다.
에미넴은 한때 힙합계에서 백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기도 했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래퍼라는 평을 듣고 있다. 언어유희의 대가이기도 하다. 미 CNN 앵커 앤더슨 쿠퍼와의 인터뷰에서 “사전 읽는 것을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말해 초고속 랩 실력이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관심과 노력의 산물임을 보여줬다.
당시 인터뷰에서 에미넴은 단어 ‘오렌지’를 넣어 문장을 만들어 달라는 갑작스러운 주문에 “I put my orange, four-inch, door hinge, in storage, and ate porridge(나는 오렌지와 4인치짜리 문고리를 창고에 넣고 죽을 먹는다)”로 단어 끝이 모두 ‘-ge’로 끝나는 문장을 단숨에 만들어내 ‘라임(rhyme·운을 맞추다) 실력’을 과시했다.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갖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 번도 시를 공부한 적이 없지만 발음을 생각하면 답이 있다. 단어를 어디서 자를지 과학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후 ‘언어의 달인(wordsmith)’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삶은 성공 이후에도 평탄하지 못했다. 2007년 수면제 과다 복용을 시작으로 약물에 빠져 산 것. 2010년 ‘리커버리(Recovery·회복)’라는 앨범을 내고 미 공영방송 NPR와 인터뷰하면서 “나는 약물중독자다. 이를 숨겨온 것은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이 앨범에 실린 ‘낫 어프레이드(Not Afraid)’란 곡의 뮤직비디오에는 에미넴이 동굴 벽을 주먹으로 부수자 빛이 쏟아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약물중독을 딛고 새로운 삶을 찾는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노랫말도 옛날처럼 분노나 욕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를 담았다.
“두렵지 않다/내 입장에 대해 분명히 하는 것이/모두 내 손을 잡아라/같이 폭풍을 헤쳐 나가자/날씨가 춥든 덥든/네가 혼자가 아니란 것을 스스로에게 다독여주자/나랑 같은 경험을 했으면 말해라(I'm not afraid to take a stand/Everybody come take my hand/We'll walk this road together, through the storm/Whatever weather, cold or warm/Just let you know that, you're not alone/Holla if you feel like you've been down the same road).”
아웃사이더 인생으로 흔들리고 쓰러지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향한 희망의 전도사가 되고 있는 그에게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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