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휴가를 즐기고 있는 남자를 상사가 급히 찾았다. 윗분이 보고서를 찾으니 빨리 업데이트해서 보내라는 것이었다. 컴퓨터도 고장이 났는데 하필이면 오늘.
“어디 가? 오후에 애 영어학원에 상담받으러 가기로 했잖아?”
짜증 내는 아내를 뒤로한 채 근처의 PC방으로 향했다. 점심을 컵라면으로 때우며 아내와 약속한 시간까지 일을 마쳐보려고 했다. 그러나 회사와 아내로부터 번갈아 재촉 전화를 받으며 하는 일이 순조롭게 풀릴 턱이 없었다.
작업이 마무리될 무렵 PC방이 시끌벅적해졌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보니까, 교복을 입은 욕쟁이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근처의 한 욕쟁이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는 욕을 해댔다.
“아! ××. 우리 M이 빡쳤다(화났다).”
다른 욕쟁이들이 따라서 키득거렸다. 엠? 남자는 영화 ‘007 시리즈’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의 상사인 M을 뜻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아닐 터였다. 게임 캐릭터인가?
“빨리 학원 가라고 지××광이네. 오늘 아침부터 ×× 빡쳐서 괜히 지×을….”
남자는 그제야 ‘에미’를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믿어지지 않았다. 중학생 또래의 남자 아이들이 자기 어머니를 그렇게 대놓고 욕할 수 있다는 것이.
그는 욱하는 성질에 욕쟁이 녀석들에게 한소리 해주려다 간신히 참았다.
그런데 왜 이 녀석들은 자기 어머니를 ‘에미’라고 부르는 것일까? 할머니한테 혼이 나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벽까지 공부만 강요하며 볶아대는 어머니에 대한 반감의 표현일까? 물론 남자는 욕쟁이들 대부분이 언젠가는 건전한 상식을 지닌 시민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지금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하더라도.
한국인에게 어머니라는 단어는 ‘희생’을 연관어로 갖고 있을 만큼 특별하다.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어머니 열풍을 일으킨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나, 지난주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를 보면 한국인 특유의 모성에 대한 희구가 잘 드러난다.
영어학원에서, 남자의 아이는 엄마가 원장과 상담을 하는 사이에도 휴대전화에 빠져 있었다. 남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전화를 빼앗아 친구들 간에 정신없이 오가는 대화를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아이 친구 중 누군가가 써놓은 글을 발견하고 말았다.
‘에미’보다 심한 말. ‘엄마 새끼’.
남자는 슬퍼졌다. 아이를 상급반에 넣기 위해 원장에게 호소하고 있는 아내의 여린 어깨가 오늘따라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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