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막 시작한 A 씨(50)는 대기업 최고경영자로 일하는 선배를 만났다가 “당장 피부 관리부터 하라”는 면박을 당했다. “요즘 세상에 푸석푸석하고 피곤에 지친 얼굴로 돌아다니는 사장과 누가 거래를 하겠느냐”는 얘기였다. 면도를 하고 난 후 스킨로션도 잘 바르지 않던 A 씨는 선배와 헤어진 뒤 바로 화장품 가게에 들러 마스크 팩부터 구입했다.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은 지난해 한국 남성이 화장품 구입에 지출한 금액이 4억9550만 달러로 세계 남성화장품 시장의 21%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성인 남성의 수가 1900만 명에 불과하고 가부장적 문화를 가진 한국이 세계 남성화장품 시장의 수도가 됐다”고 전했다. ‘마초’ 한국 남자들이 달라진 건 1990년대 들어서다. 1997년 소망화장품의 ‘꽃을 든 남자’ 컬러로션이 등장하고 2002년 월드컵 스타인 안정환 같은 ‘꽃미남’이 각광을 받으면서 화장하는 남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요즘은 남성화장품 종류만 수십 가지다.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 남성 고객을 상대하는 남성 직원도 등장했다. 아내들은 “남편 화장품값까지 대야 할 판”이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자연계에는 화려한 치장을 한 수컷이 흔하다. 진화론 창시자인 찰스 다윈은 공작 수컷의 현란한 꽁지깃을 성 선택(sexual selection)의 결과로 설명했다. 수컷이 짝짓기에서 선택받기 위해 암컷이 좋아하는 꽁지깃을 대물림했다는 것이다. 수컷이 짝짓기를 위해 생존에 불리하고 거추장스러운 꽁지깃의 위험마저 감수한다는 핸디캡(단점)이론도 나왔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여성이 선호하는 외모를 갖추기 위해 남성이 화장을 한다는 해석이 나올 법하다.
▷한국 남자의 화장은 외모지상주의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의 측면도 크다. 어느 60대 최고경영자는 사무실을 나설 때면 자외선차단크림을 꼭 바른다. 햇볕에 노출돼 검버섯이라도 생기면 은퇴해야 할 퇴물로 비칠까봐서다. 젊어 보이려고 염색을 하는 것은 기본이다. 한국 기업의 평균 정년기준은 57.4세지만 실제 직원들이 퇴직하는 평균 연령은 53세다. 취업난과 조기 은퇴 압력이 상수(常數)가 된 시대,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남성들의 진화가 화장하는 남성의 시대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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