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내려왔다 추수 끝내고 서울 가는 아우야 동구 단풍 물든 정자나무 아래 ― 차비나 혀라 ― 있어요 어머니 철 지난 옷 속에서 꼬깃꼬깃 몇 푼 쥐여주는 소나무 껍질 같은 어머니 손길…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고개 숙여 텅빈 들길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우야 서울길 삼등 열차 동구 정자나뭇잎 바람에 날리는 쓸쓸한 고향마을 어머니 모습 스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어머니 어머니 부를 아우야 (…) 고향마을 떠나올 때 어여 가 어여 가 어머니 손길이랑 눈에 선하다고 강 건너 콩동이랑 들판 나락 가마니랑 누가 다 져날랐는지요 아버님 불효자식 올림이라고 불효자식 올림이라고 너는 편지를 쓸 것이다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어른들은 해가 중천에서 좀 기울어질 무렵이라야, 차례를 치러야 했고 성묘를 해야 했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누다 보면 한나절은 넘는다. (…)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 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첫머리는 1897년 한가위에서 출발한다. 그때로부터 한참을 달려왔다. 고향과 명절을 대하는 생각도 사뭇 달라졌다. 그래도 녹록지 않은 세상에서 모처럼 근심을 내려놓고 그리운 이들과 마주 앉아 도란도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한가위는 여전히 축복의 시간이리라. 이번 추석엔 고향 찾아 이동하는 인원이 2925만 명으로 예상된다는데 짧은 연휴 탓에 귀성길이 고달플지도 모르겠다.
덜컹대는 삼등 열차를 타고 귀향했던 어느 ‘불효자식’을 호명한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17-동구’는 젊은 세대에겐 조금 낯선 추석의 정겹고도 가슴 시린 풍경을 오늘에 되살려낸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는 게 누추했던 시절, 소박하고 훈훈한 정으로 삶의 남루를 긍정한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아름답고 애잔하게 스며 있다.
한가위에 맞춤한 휘영청 밝은 달과 섬진강 푸른 물이 어우러진 화가 송필용의 작품도 타향의 도시 생활에 지친 귀성객들에게 출렁이는 생명의 기운으로 위로와 평안을 주는 그림이다. 전남 담양에서 20여 년 작업해온 작가는 속도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픈 소망으로 물과 달을 즐겨 그렸다고 말한다.
살림살이는 어느 정도 풍족해졌으나 고향은 서먹해지고 사람의 향기는 점차 옅어져 가는 세상에 어느덧 와버린 듯하다. 뭘 위해 현기증 나도록 달려온 것인지 마음 한 구석 허탈하고 허전하다면, 사라져버린 것과 변치 말아야 할 것에 대해 한번 곰곰이 돌아보라고 시와 그림은 말하는 것 같다. 이 변함없이 좋은 가을 달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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