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유신, 인혁당 재판이 헌정가치를 훼손했다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의 사과는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불효(不孝)인가 아닌가. 프랑스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처럼 난해해 보이는 이 질문은 사실 중요한 윤리적 의미를 담고 있다.
대학 시절 읽은 소학(小學)에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대목이 있다. 아버지가 잘못했을 때 자식의 처신, 임금이 잘못했을 때 신하의 처신, 스승이 잘못했을 때 제자의 처신을 다룬 대목이다. 아버지가 잘못했을 때 자식은 그 잘못을 감추는 일은 있어도 고치겠다고 나설 수는 없다. 그러나 임금이 잘못했을 때 신하는 임금의 얼굴색이 변해도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스승이 잘못했을 때는? 그런 경우는 없다. 스승에게 지적할 잘못이 있으면 이미 스승이 아니다.
소학이 답할 수 없는 윤리적 난제
박근혜가 박정희재단의 이사장 정도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아버지의 잘못이 있더라도 불가피했다고 옹호하는 것이 효(孝)다.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비판할 수 없지만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사람으로 대통령이었던 아버지를 비판할 수 있는가. 소학은 부자(父子)의 윤리와 군신(君臣)의 윤리는 다르다고 했지만 부자가 곧 군신인 경우의 윤리는 답하지 않았다.
일본 에도(江戶) 시대 유학은 치자(治者)의 윤리와 피치자(被治者)의 윤리를 구별해 그 해답을 추구했다. 46인의 사무라이가 억울하게 죽은 주군의 원수를 갚았다. 이들을 처형해야 하는가가 논란이 됐다. 사무라이의 복수는 의롭다고 하겠지만 그 의로움은 그들 무리에서나 한정되는 얘기다. 막부는 그들을 처형했다. 사무라이의 의리는 사적으로 옳지만 공적으로 옳지 않다. 일본 유학은 개인 윤리와 정치 윤리의 연속성을 끊음으로써 공(公)을 사(私)로부터 분리시키고 근대화를 준비했다는 것이 일본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주장이다.
조선 효종 사후의 예송(禮訟)은 그 함의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을지 모른다는 게 사회학자인 경희대 김상준 교수의 생각이다. 송시열과 허목은 죽은 소현세자의 동생인 효종을 인조의 맏아들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갖고 논쟁을 벌였다. 나중에 논쟁에 끼어든 윤휴는 효종은 임금이기 때문에 맏아들이라고 함으로써 가례(家禮)로부터 왕례(王禮)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치자의 윤리가 피치자의 윤리로부터 분리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왕(王)도 신(臣)도 똑같은 인륜에 지배된다는 노론의 이념이 지배한 조선 후기 사회는 그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다.
자식이 아버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개인 윤리에서는 불효다. 그러나 통치자는 아버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바로잡는 게 도리다. 동생이 형을 꾸짖는 것은 집에서는 예의가 아니지만 그 동생이 대통령이라면 주저없이 해야 한다. 그것을 못해서 노건평 씨와 이상득 씨가 감옥에 갔다.
박씨 집안의 장녀로서가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박근혜의 아버지 비판은 따라서 윤리적이다. 박근혜가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사로잡혀 있는 한 효녀는 될지언정 통치자는 될 수 없다. 박정희 역시 자기 시대의 제약 속에 살았던 사람이다. 유신은 헌정(憲政)을 유린한 독재였고 인혁당 사형선고는 그 시대의 가장 암울한 순간이었다.
아버지라도 넘어서는 게 정치의 윤리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사용해 정신적 부친 살해가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했다. 황금시대가 과거에 있었다고 보는 사회에서 오이디푸스는 있어서는 안되는 인간이다. 그러나 미래가 과거보다 나을 것으로 보는 사회는 정신적 부친 살해를 감행한다. 박정희라면 개인의 윤리와 구별된 정치의 도리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저승에서 딸에 대한 애정을 이렇게 표현할지 모른다. “내가 죽도록 사랑한 이 나라를 네가 발전시키고 싶다면 네가 먼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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