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던 안 원장은 ‘시민후보’를 자임한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지지하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1시간 전인 오후 3시, 박 변호사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만나 “범시민 야권 단일후보를 통해 한나라당(현재 새누리당)과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합의했다.
오후 7시엔 문 이사장이 주도하는 야권 통합 추진모임 ‘혁신과 통합’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발족식을 가졌다. 문 이사장을 비롯해 이해찬 전 국무총리, 문성근 ‘국민의 명령’ 대표 등 16명이 공동대표로 추대됐다. 이들은 제안문에서 “누구보다 민주당은 기득권을 버리고 자기혁신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특히 문 이사장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관련해 “승리하기 위해 반드시 야권 단일후보를 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안 원장의 불출마에 대해 “아름다운 결단”이라고 추켜세웠다.
이날 안 원장의 양보로 야권 단일후보론의 당위성과 추진력이 태풍처럼 세를 늘리면서 ‘혁신과 통합’의 역할도 함께 커졌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레이스 초반, ‘혁신과 통합’은 민주당에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고 압박하며 안팎으로 박 변호사를 지지했다. 결국 50년 전통의 제1야당 민주당은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못했고, ‘민주당 주도의 야권통합론’도 잦아들었다.
박 시장 당선 뒤 ‘혁신과 통합’은 민주당을 제치고 야권의 가장 의미 있는 정치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문 이사장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후인 11월 1일 민주당 생활정치연구소 초청 간담회에서 “민주당이 다 버리고 다 던질 수 있다면 총선과 대선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민주당 내에선 “이름 하나로 민주당이 지향할 두 가지 가치인 ‘혁신’과 ‘통합’을 선점당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뼈아픈 자성이 터져 나왔다.
한 달 뒤인 12월, 결국 민주당은 해체됐다.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이 손을 잡고 ‘민주통합당’이란 신당을 창당했기 때문이다. 문패를 바꿔 단 신당에서 ‘창업 공신’인 문 이사장과 이 전 총리 등은 전직 당대표나 전직 국회의장 등에게만 주어져 온 ‘상임고문’이란 직함을 받았다. 당의 최대주주인 친노(친노무현)세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이 전 총리는 당 대표로, 문 이사장은 대선후보로 각각 선출됐다. 결과적으로 ‘혁신과 통합’이 당대표와 대선후보를 배출한 셈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문 후보가 ‘혁신’과 ‘통합’을 내걸고 야당의 문을 두드린 지 꼭 1년 만에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새로운 정치’를 내세워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야권후보 단일화의 전제조건에 대해서도 “민주당의 변화와 혁신”을 꼽았다. 야권후보 단일화의 파트너인 문 후보에게, 문 후보가 저작권을 갖고 있는 ‘혁신’과 ‘통합’을 안철수식 버전으로 바꿔 문 후보를 몰아붙이고 있는 형국이다. 어찌됐든 1년 전 민주당에 기득권 내려놓기를 요구하며 혁신과 통합을 외쳤던 일이 문 후보에게 부메랑이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문 후보는 민주당 혁신과 야권 단일후보란 통합 요구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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