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하는 아들 내외를 대신해 손주 셋을 키운 필자의 할머니는 1년 전에 돌아가셨다. 당시 할머니를 보내 드리면서, 앞으로 추석 즈음이 설렘의 시간이 아닌 우울과 그리움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필자에겐 특별한 할머니였다.
이렇게 애틋한 할머니를 추억하는 강력한 모티브 중 하나는 향수다. 이른바 ‘노인 냄새’가 주변에 불편하게 느껴질까 봐 그러셨는지, 할머니의 향수는 나이와 비례해 조금씩 짙어졌다. 거동이 불편해 방에만 계시는 시간이 길어지던 무렵에도 향수 한 방울씩은 잊지 않고 손목에 묻히셨다. 향수는 황혼의 80대 여성을 마지막까지 여자이게 한 아이템이었던 셈이다.
할머니의 향수를 새삼 떠올린 것은 미국의 한 웹사이트를 보고 나서였다. 뉴욕의 스트리트 사진가 아리 세스 코언 씨가 운영하는 ‘어드밴스트 스타일’이라는 이 사이트는 거리에서 마주친 할머니들의 패션 감각과 패션 속에 담긴 인생사를 소개한다.
그가 길가에서 만난 할머니들은 정말 멋졌다. 샤넬풍 정장을 갖춰 입은 조신한 스타일에서부터, 징과 체인으로 단장한 힙합 스타일까지…. 서른 살인 코언 씨는 “패션 업계에서 무시돼 온 할머니들의 스타일을 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들이야말로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입고 싶은 것을 고를 수 있는 주체적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코언 씨가 카메라에 담았던 두 할머니, 재클린 타야 머독 씨(82)와 치포라 살라몬 씨(62)는 프랑스의 럭셔리 브랜드 ‘랑방’의 이번 가을·겨울 시즌 광고모델로도 발탁됐다.
이번 시즌 패션 업계는 유독 할머니들의 성숙미에 주력하는 분위기다. 앳된 소녀들이 도발적 포즈를 취하는 광고로 유명한 의류 브랜드 ‘아메리칸 어패럴’은 이번 시즌 처음으로 61세 모델을 기용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픽업됐다는 아마추어 할머니 모델 재키 씨는 ‘어드밴스트 베이직스’ 라인의 광고 속에서 다리를 쫙 벌리고 앉는 등 심상치 않은 포즈를 소화해 냈다.
이탈리아의 고급 보석 업체 ‘불가리’는 여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60)를 모델로 등장시켰다. 자신의 이름을 딴 가방 라인을 불가리와 함께 선보이고 있는 그가 직접 모델로까지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립스틱과 하이힐, 핸드백을 똑같이 강렬한 빨간색으로 맞춘 뒤 눈가 주름은 ‘생얼’ 상태 그대로 노출한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의 멤버십 잡지, ‘S신세계스타일’은 9월호 커버 모델로 배우 장미희(54)를 내세웠다. 이 잡지가 국내 셀러브리티를 커버 모델로 내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부츠에 핫팬츠를 입은 모습으로 화보 속에 등장한 그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 사람이 필자만은 아니었을 듯하다.
어쨌든 이번 시즌을 관통하는 ‘할머니 트렌드’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들이 섹시하고 당당하게 그려졌다는 점이다. 주변의 한 여성은 “남성은 나이가 들수록 연륜의 멋이 느껴진다고 하면서 여성의 나이 듦은 죄악시했던 통념이 깨지는 듯해 통쾌한 심정”이라고까지 말했다.
나이를 먹는 게 자연의 이치이듯,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역시 변치 않는 여자의 본능이다. 수명 증가로 앞으로 좀 더 긴 인생을 살게 된 여성들이 나이가 들어서도 자신만의 멋을 추구하면서 사는 게 자연스러운 사회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 힙합 바지를 입고 활보하는 할머니들을 서울 거리에서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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