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와 인천을 잇는 경인 아라뱃길에 다녀왔다. 배로 한 번, 자동차로 두 번. 아라마루 수향원 아라타워 갑문 등 곳곳에 볼거리가 많다. ‘수향팔경’이다. 아라뱃길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무신정권이 굴포운하 건설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조선 중종 때 또 한 번 실패했고 굴포천만 남아 홍수를 동쪽 한강으로 빼는 역할을 해왔다. 1987년 이 지역에 대홍수가 나자 정부는 물을 서쪽 인천 앞바다로 빼는 방수로를 파기로 했다.
MB-오세훈-박원순의 뱃길 신경전
건설부를 비롯한 ‘토건족(土建族)’들은 곧바로 이를 경인운하로 확대하려 했다. 예산당국이 반대하자 1995년 민자(民資)사업으로 바꿨다. 하지만 운하는 타당성 논란을 넘지 못했고 방수로 공사만 진행됐다. 운하가 부활한 것은 이명박(MB) 정부가 들어선 2008년이었다. 한반도대운하가 4대강 사업으로 쪼그라들면서 상실감에 빠진 청와대에 국토해양부가 경인운하를 슬그머니 들이밀자 곧바로 통했던 것. 운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사업명을 아라뱃길로 바꿨고, 금년 5월 개통했다.
아라뱃길의 동생뻘이 ‘서해뱃길’ 사업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주창한 한강르네상스의 한 갈래로, 아라뱃길에 한강 수운을 이어 용산-여의도-김포-인천-중국 칭다오 및 상하이를 잇는 물류 노선을 구축하겠다는 것이었다. 양화대교의 교각과 상판 교체도 이 때문에 시작됐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은 취임 직후 ‘시민 삶과 무관한 혈세 낭비’라며 한강르네상스와 서해뱃길을 백지화했다. 서울시는 심지어 주말에 여의도-김포-인천-덕적도 구간을 오가던 여객선의 여의도선착장(서울시 관할이다) 이용을 불허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 배는 한강으로 못 들어온다. 놀란 중앙정부가 조정에 나선 끝에 한강 구간 운항은 ‘9월 말까지’ ‘올 연말까지’ 식으로 간당간당 연장되고 있다.
대운하 논란이 어지럽던 2008년 기자의 직책은 경제부장(대운하 관련 편집국 주무부장)이었다. 기자는 회의적이었다. 운하란 기본적으로 물류 수단, 즉 경제사업인데 천문학적 공사비용 대비 편익이 워낙 낮아서다. 반면 4대강은 반대하지 않았다. 치수(治水) 및 국토정비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아라뱃길은 어떨까. 대운하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그렇다고 기왕에 있던 방수로에 부두와 갑문 시설만 추가한 건 아니다. 당초 40m 폭을 80m로 넓히고 6.3m 깊이로 파면서 사업비가 3.5배(2조2500억 원)로 커졌다. 그러나 현재 운하시설은 거의 개점휴업이다. 계획과 달리 중국 일본을 오가는 배는 없다. 여기엔 5000t급 꼬마 배만 오갈 수 있는데 서해를 다니는 3만∼5만 t과 경쟁이 안 돼서다(요즘 원양상선은 10만 t급이 대세다). 인천-김포의 내륙구간에선 트럭에 진다. 그래서 김포터미널엔 연안 벌크선이 월 2, 3회만 온다. 컨테이너선은 개통 초 주 1회 김포에 왔지만 이제 운항이 끊겼다. 하루 8회 왕복하겠다던 김포-인천 유람선도 손님이 없어 ‘하모니호’가 1회 다닐 뿐이다. 한반도 대운하가 완성됐더라면 아마 이 꼴이 났을 것이다.
정치에 휘둘리고 뒤틀리는 정책
아라뱃길은 물길 따라 자전거길이 평탄하게 나 있어 사이클 족에게는 환상의 코스다. 그렇지만 ‘방수로+수변 여가공간’을 만드는 데 그쳤다면 투자비의 70%가량을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라뱃길에는 한국에서 정책이 세워져서 바뀌고 버림받는 과정이 잘 응축돼 있다. 토건족이 주도한 운하사업은 사업 타당성 문제로 폐기됐으나 ‘대운하의 대체재’로 부활했다. MB 청계천에 견줄 만한 것을 남기고 싶었던 오 전 시장은 서해뱃길로 판을 키웠다. 박 시장은 “전임자 사업이라고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 공약했으나 이미 존재하는 두 물길을 끊어버리겠다며 몽니를 부린다.
아라뱃길은 합리성이나 시민 편익과 무관한 정치에 의해 정책이 어떻게 휘둘리고 뒤틀리는지, 국민과 언론의 부릅뜬 감시가 왜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구조물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