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세계은행 본부에 들어서면 ‘가난 없는 세상이 우리의 꿈이다’라는 슬로건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은행이 개발도상국에 제공하는 대부금은 빈곤 퇴치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세계은행 책임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복잡한 금융지식이 아니라 이 사명에 대한 충실함이었다. 의사 출신 인류학자인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이 세계은행의 총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빈곤퇴치의 사명감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세계 성장 위한 마지막 자원
김 총재의 최근 행보는 세계은행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양성(兩性)평등 전도사 같다. 그는 어디에서나 “세계가 성장을 위한 부가자원을 찾는다면 그것은 여성”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최근 양성평등 관련 사업에 대한 지원 증대는 최근 세계은행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다. 양성평등 지원 규모는 2010회계연도(2009년 7월∼2010년 6월)의 대출 활동 중 53%를 차지한다. 2006회계연도의 34%에서 꾸준히 상승했다. 2006∼2010회계연도에 증가한 금액이 190억 달러에 이른다. 양성평등 관련 지원은 피임 보건교육, 유아 및 어머니에 대한 영양지원, 소녀를 위한 학교, 여성에 대한 기술지원 등이다.
세계은행이 양성평등에 눈뜬 것은 대출 시스템에 대한 뼈아픈 반성에서 출발했다. 오랫동안 길을 놓으라고, 학교를 세우고 우물을 파라고, 엄청난 금액을 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 개도국에 지원했지만 막상 현장에 가보면 도로도 학교도 없었다. 돈은 정치인의 배를 채웠고 관료들의 호주머니로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대부분 문맹인 주민은 이러한 지원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일부 프로그램에서 성과가 나기 시작했다. 브라질에서는 가계소득 관리를 어머니가 맡을 경우 자녀의 생존 확률이 20배가 더 높았고 가나는 여성이 경작했을 때 소출이 17% 늘었다. 우간다가 농업 프로젝트에 처음으로 여성을 포함시키자 생산성이 급증했다. 글자를 깨친 여성들이 “우리에게 와야 할 지원금을 내놓으라”고 데모하기 시작하자 공무원은 뇌물을 챙기기 힘들어졌다. 엄마들은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고 돈 벌어 오라며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앤드루 메이슨은 “양성평등은 그 자체로 옳은 가치이지만 무엇보다도 경제개발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세계은행이 최근 발간한 동아시아·태평양 지역 보고서에 따르면 남녀 간 고용 장벽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노동생산성을 7∼18% 높일 수 있다. 생산성이 높아지면 소득이 늘고 이는 빈곤퇴치로 이어진다. 양성평등이야말로 세계은행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빈곤퇴치의 황금열쇠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성 지위를 아시아의 다른 개도국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편견이었다. 한국은 유아 사망률 같은 지표는 세계 최고였지만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2005년 기준)은 세계 평균에 겨우 근접했고 남녀 간 임금격차는 지역 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한국, 아직 개도국형 남녀 불평등국
한국은 선진국형 문제와 개도국형 문제가 공존하는 이중 딜레마에 빠져 있다. 여성 의원 비율은 14% 수준으로 중국 캄보디아 베트남에 못 미친다. 여성이 최고위직에 오르지 못하는 유리천장(glass ceilings)이 여전하지만 저임금 직종에서 남녀 간 임금격차가 벌어지는 ‘끈끈한 바닥(sticky floors)’도 존재한다. 끈끈한 바닥이란 여성이 저임금 직종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2009년 여대생 수가 남자 대학생을 추월했다. 그런데도 우수한 여성 자원이 유리천장에 막히고 끈끈한 바닥에 달라붙어 역량 발휘를 못하고 있다. 이것만 터주어도 우리 경제가 더 도약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워싱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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