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4>라벨과 나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15일 03시 00분


라벨과 나
―김영태(1936∼2007)

내 키는 1미터 62센티인데
모리스 라벨의 키는 1미터 52센티 단신(短身)이었다고 합니다
라벨은 가재수염을 길렀습니다
접시, 호리병, 기묘한 찻잔을 수집하기
화장실 한구석 붙박이
나무장 안에 빽빽이 들어찬
향수(香水) 진열 취미도
나와 비슷합니다
손때 묻은 작은 소지품들이 (누에 문양 포켓수건이나 열쇠고리까지)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냄새, 빛깔도 (그가 작곡한 ‘거울’ 속에 비친 사물들)
저 혼자만인 둘레에
지금도 남아 있는

전신이 훅훅 달아올라 땀에 흠뻑 젖은 채 지쳐 쓰러질 때까지, 뛰고 또 뛰게 하는, 살아 있는 몸의 환희! 힘찬 심장의 박동을 찬란하게 묘사한 모리스 라벨의 춤곡 ‘볼레로’가 귀에 쟁쟁하다. 그리고 이 시가 보여주는 그이의 조용한 공간. 마음이 끌려 모아들인 물건들로 살뜰히 채워진.

수집가의 애착은 수집물 하나하나의 정령을 불러낸다. 그렇게 수집물의 것이기도 하고 수집가의 것이기도 한 색채와 냄새가 남실거리는, 그 작고 완벽한 세계에서 노닐며 수집가는 너무도 순수한 행복감을 느낀다. 그럴 것 같다.

춤과 무희들을 사랑했던 탐미적 시인, 김영태 선생님. 키가 작으셨지만, 키 큰 남자를 부러워하지도, 아름답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듯하다. 큰 목소리, 큰 집, 큰 키. 어찌 생각하면 ‘큰 것’은 아름답지 않을 뿐 아니라 쓸데없기도 하다. 커서 좋은 건 마음뿐이려나.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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