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했던 13일 오후 경기 파주시 임진각은 북적였다. 대형 놀이시설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어린이용 놀이기구 위주로 꾸며져 가족 나들이객이 많았다. 임진각 한쪽을 한바퀴 도는 미니 관광열차도 운행할 때마다 만석이었다. 반환점인 ‘버마 아웅산 순국외교사절 위령탑’을 돌 무렵 “저 탑은 왜 세웠느냐”는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의 질문에 아빠가 대답했다.
“옛날에 대통령이 버마라는 나라를 방문했는데 북한 스파이가 폭탄을 터뜨리는 바람에 장관처럼 높은 사람이 많이….”
1983년 10월 9일 북한이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던 외교사절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통령은 정확히 1년 뒤 북한에서도 보이는 경기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에 대형 위령탑을 세웠다. 2800m²(약 848평) 터에 17m 높이로 우뚝 선 위령탑은 경건한 추모의 의미와 함께 단호한 ‘반공’ 의지도 담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웅산 테러 희생자들의 29주기를 지내고 며칠 안 된 이날 위령탑 앞에선 향을 피운 흔적, 국화 한 송이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희생자 수를 상징하는 계단 17개는 드문드문 주저앉았다. 향로는 녹슨 자물쇠로 채워져 언제 열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미얀마 현지에 추모비가 없으니 서둘러 건립하자’는 주장이 최근 제기됐지만 임진각에서 녹슬고 무너져가는 이 땅의 위령탑부터 손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위령탑은 한때 남북 화해 무드에 밀려 현재의 자리에서 옮겨질 뻔했다. 경의선 복원 때문이다.
남북을 잇던 경의선은 6·25전쟁 직후 끊겼다. 이에 따라 한국에선 문산역까지만 운행됐고 그 북쪽 구간은 수십 년간 방치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남북 화해 무드가 본격화하면서 경의선 복원이 추진됐다. 지뢰도 문제였지만 이 위령탑도 복원공사의 걸림돌이었다. 원래 노선 일부가 이 위령탑을 지나고 있었던 것. 철도청은 이런 상황을 감안해 고심 끝에 우회를 결정했다. 위령탑 왼쪽으로 30m가량 노선을 살짝 돌렸다. 복원한 경의선이 원래보다 1km가량 늘어난 이유다.
2001년 9월 30일 경의선 개통 당시 이런 배경 때문에 ‘냉전의 상징이 통일의 기반을 튕겨 냈다’는 말이 돌았다. 역으로 경의선 복원 공사 때 노선을 고집해 위령탑을 이전했다면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왔을 법하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아웅산 테러는 옛날 일이 돼 버렸고 남북 관계에서 정반대의 시대를 상징하는 위령탑과 경의선은 좌우 정부가 수립한 공동정권인 ‘코아비타시옹’처럼 ‘어색한 동거’를 이어 가고 있다.
남북 교류의 상징 도라산역을 오가는 열차는 하루 3∼8회 위령탑 바로 옆을 지난다. 이 장면은 때론 무력으로 충돌하고, 때론 한 테이블에서 대화하는 남과 북의 현주소를 떠올리게 한다. 남북의 대치를 증언하는 위령탑과 화해를 상징하는 경의선의 공존이 벌써 11년을 넘기다 보니 이젠 익숙한 풍경이 되고 있다.
이런 ‘익숙함’이 두렵다. 무심코 접하는 일상의 모습은 지난 일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추억을 떠올리듯 “옛날에 말이지…”라고 설명하기엔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등 17명의 희생이 너무나 참혹했다. 북은 아직도 사과하지 않는다.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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