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은 대개 여유롭고 매사에 서두르는 법이 없이 느긋하게 생활하는 편이다. 풍요롭진 않더라도 나름대로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필자의 집안도 비록 부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은 따뜻하고 행복한 곳’이라고 늘 생각했다. 집안에는 먹을 것이 저장돼 있었고 동네사람들과도 종종 파티를 하면서 정겹게 살았던 추억이 있다. 지금도 몽골 초원에 가 보면 고즈넉한 초원 위에 띄엄띄엄 게르(유목민이 거주하는 천막형 주거지)가 있고 근처에서 소와 양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렇게 여유 있고 목가적인 몽골에서 자랐지만 최근 10여 년간 한국에 살면서 어느새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돼 버렸다.
거리에서나 캠퍼스에서나 한국 사람들은 무척 바쁘게 움직인다. 나도 사람들과 더불어 똑같이 발걸음이 빨라진다.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열차를 타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같이 뛴다. 열차를 타고는 ‘내가 왜 이렇게 뛰었지? 나는 다음 열차를 타도 괜찮은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음 열차를 탈 때는 또 뛰게 된다. 이미 ‘빨리빨리’ 문화에 푹 빠져버린 듯하다. 예전에 학회 참석차 터키를 방문했다가 유명 관광지에 들르게 되었다. 그때 터키인 관광가이드들이 필자를 한국인으로 생각하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한국말로 “자, 빨리빨리 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아, 이제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전 세계에 보급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한국을 모델국가로 여기고 있다. 1960년대 초반 일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 수준에 불과했던 한국은 2012년 현재 2만 달러 수준으로 올라갔는데 이런 급격한 변화를 보인 나라는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게다가 다른 선진국이나 고소득국가가 보유한 지하자원이나 특별한 자산도 없이 전란으로 피폐한 나라가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했기에, 거의 신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제적 성장을 흔히 압축성장이라고 이야기한다. 말이 그렇지 성장도 힘든 것인데 그 어려운 성장을 압축해서 이루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 특유의 집념과 열정이 바탕이 된 이 신화적 발전에 ‘빨리빨리’ 문화가 공헌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삶을 대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우리 몽골의 ‘슬로(slow)’ 개념을 잘 활용할 것을 제안해본다. 이솝 우화에서 느린 거북이가 빠른 토끼를 이겼듯이 어찌 보면 느긋하게 생활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더 빠른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음식에 대한 세계적 관심은 패스트푸드(fast food)가 아닌 슬로푸드(slow food)로 쏠리고 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만들고 먹는 음식에는 느린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 음식의 맛과 향, 그리고 정성까지 느낄 수 있는 여유 있는 식사 시간을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마찬가지로 무조건적인 ‘빨리빨리’ 문화보다는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여유를 즐기고 현재의 풍요를 한껏 느끼며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가는 삶의 방식이 한국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심각하게 빠져있는 필자 자신이 몽골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 느긋한 삶의 방식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삶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기보다는 누려야 할 대상이 아닐까. 느긋한 마음가짐으로 앞뿐 아니라 옆도 보면서 살아가자.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누르기보다 바깥에서 뛰어오는 사람을 챙겨보고 열림 버튼을 누르면서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대해 본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