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재 대학의 A 교수가 기업들이 입사 시험 응시자들에 대해 어떤 차별을 하는지 연구하기 위해 1900여 장의 가짜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가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A 교수 연구팀은 가짜 주민등록번호와 사진을 이용해 출신 학교, 토익점수, 성별, 군복무 여부 등의 조건을 바꾼 16종의 허위 지원서를 만들어 121개 기업의 올 하반기 신입사원 공채에 제출했다. A 교수는 경찰 조사에서 “대기업 채용 단계에서 스펙에 따른 차별을 측정하기 위한 연구의 일환”이라고 밝혔다.
▷‘스펙’은 기계장비의 성능 명세서를 뜻하는 영어단어 ‘스페시피케이션(specification)’의 줄임말로 취업에 필요한 자격 조건을 의미한다. 대학생들은 토익점수, 해외연수, 자격증, 봉사활동, 인턴 경험을 흔히 ‘스펙 5종 세트’라고 부르며 대학 학점과 함께 취업난을 돌파하는 만능열쇠쯤으로 여긴다. 한 취업 사이트에 따르면 국내 주요 기업 합격자의 평균 토익점수는 852점, 학점은 3.7점, 어학연수 1회, 자격증 1.8개, 인턴 경험 1.1회, 봉사활동 0.9회, 각종 수상 1회인 것으로 나타났다.
▷A 교수는 대기업이 채용 과정에서 어떤 스펙을 중시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준비했다. 예를 들어 출신 학교와 성별이 같은 조건일 때 토익점수가 서류전형에 미치는 영향을 실제로 검증해 보겠다는 것이다. 스펙 차별이 그만큼 기업 현장에 널리 퍼져 있다는 얘기다. 대선후보들도 “스펙 초월 청년취업센터를 설립하겠다”(박근혜), “스펙 없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문재인), “스펙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안철수)며 비판에 가세하고 있으나 명확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스펙 위주의 채용을 비판만 할 수는 없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학점, 어학능력, 해외연수, 인턴 경험과 같이 오랫동안 쌓아온 성과야말로 지원자를 차별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현실적 근거”라며 “보여주기 식의 스펙은 면접 전형 등을 거치며 걸러지게 된다”고 말했다. 취업 컨설턴트들은 “구직자들이 ‘어떤 일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다’는 식의 막연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스펙이 취업 문턱을 넘는 도구로 변질됐다”고 지적한다. 구직자의 취업 목표가 직장이 아닌 직업으로 바뀔 때 스펙 차별 논란도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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