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9>여행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26일 03시 00분


여행자
―전동균(1962∼)

일찍이 그는 게으른 거지였다
한 잔의 술과 따뜻한 잠자리를 위하여
도둑질을 일삼았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왕으로 법을 구하는 탁발승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나기도 하였다
하늘의 별을 보고
땅과 사람의 운명을 점친 적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눈먼 떠돌이 악사가 되어
온 땅이 바다고 사막인 이 세상을
홀로 지나가고 있으니

그가 지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흐름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저 허공의 구름들처럼
말 없는 것들, 쓸쓸하게 잠든 것들을 열애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거지였다가 왕이었다가 탁발승이었다가. 하늘의 별을 보고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었다가 지금은 눈먼 떠돌이 악사.

‘여행자’는 스케일이 큰 시다. 전지적(全知的) 화자가, 공간만 옮겨 다니는 게 아니라 생을 거듭하며 한없이 광활한 시간을 지나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정말 환생이라는 게 있을까? 그것은 이 지친 떠돌이 악사의 환상이 아닐까? 눈멀어 그 자신은 볼 수 없는, 머리 위 허공 구름 같은.

어떤 생도 ‘저 허공의 구름들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을 테지만, 이 시 ‘여행자’는 그런 생에 덧없음이 아니라 가없음의 후광을 드리운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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