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노무현식 정권교체 반복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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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7일 03시 00분


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기록물 관리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참모들에게 “모든 기록물을 남기라”고 지시했고, 기록물 담당 비서관을 만날 때마다 “잘 챙기라”고 당부했다. 각종 회의를 마치면 자신이 메모한 것을 담당 비서관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역대 8명의 대통령이 남긴 기록이 모두 33만 건인 데 비해 노 전 대통령이 남긴 기록은 825만 건이니 기록에 대한 그의 집착을 짐작할 만하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기록 생산-보존과 달리 인계는 부실

노무현 청와대는 후임 이명박 청와대에 자료 축적 시스템인 이지원(e-知園)과 1만6000여 건의 기록물을 넘겼다. 그러나 이명박 청와대의 표현에 따르면 이지원은 ‘빈 깡통’이었고, 기록물은 ‘치약을 짜는 법’ 같은 매뉴얼을 적은 하찮은 업무자료가 고작이었다. 주요 인사 파일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명박 인수위가 정부 각 부처의 정책평가서를 달라고 하자 노 전 대통령은 “반성문을 쓰라는 얘기냐”고 반발한 적도 있다.

반면 노 전 대통령은 퇴임하면서 ‘회고록 집필을 위해’ 240만 건의 기록물 사본을 사저(私邸)로 가져갔다가 논란이 일자 반환했다. 더 기막힌 것은 ‘대통령지정기록물’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34만 건의 기록을 생산 주체인 대통령 본인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게 묶어놓았다는 점이다. 2007년 4월 제정된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정부의 안과 정문헌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예문춘추관법안을 합쳐 국회 소관 상임위에서 만든 것이지만 대통령지정기록물 조항은 거의 정부안 그대로 채택됐다.

예문춘추관법안에도 특정기록물 조항이 있지만 ‘국가 이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에 한하여’ ‘최소한의 범위에서’ 지정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대통령지정기록물 조항은 그 범위를 정무직 공무원 등의 인사에 관한 기록물,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기록물, 대통령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한 기록물로까지 넓혔다. 대통령 마음대로 자물쇠를 채울 수 있게 한 셈이다. 국회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나 관할 고등법원장의 영장 발부가 없으면 기록물 종류에 따라 15년 또는 30년까지 아무도 볼 수 없다. 법안의 국회통과에 234명의 의원이 찬성했으니 사실상 여야 합작품이나 다름없다.

이 법이 유지된다면 이명박 대통령이나 후임 대통령들은 고맙기 그지없을 것이다. 민감한 자료들을 몽땅 대통령지정기록물이라는 금고 속에 집어넣으면 나중에 꼬투리 잡힐 일이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 기록물이 이런 식으로 관리된다면 국가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대통령이 재임 중에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후대의 역사에 남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다음 정권에서 참고하거나 활용할 수 있게 해 국정의 연속성과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권 인수인계 새 규범 만들어야

미국의 정권 인수인계는 권력의 공백을 막고 정부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행정부 주요 인사들의 기록을 주고받는 것은 기본이다. 대통령 당선자와 핵심 각료 내정자들은 전임 정권으로부터 국정 전반에 관한 상세한 브리핑을 받고 취임 후 6개월 이내에 처리해야 할 우선 정책목록도 전수받는다.

우리도 정권 인수인계에 관한 규범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지정기록물은 엄격히 기준을 정해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나머지 중요한 국정 자료들은 일정 기간 비공개 기록으로 분류하되 비밀취급 인가자는 열람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대신 비밀기록을 누설할 경우 처벌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앞뒤 정권이 비밀기록을 국정에만 활용하고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않는다는 신사협정도 맺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기록의 생산과 보존뿐만 아니라 인수인계도 원활할 수 있다. 노무현식(式) 정권 교체라면 국정은 5년마다 단절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정권교체#인수인계#청와대#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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