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신광영]판결과 상식의 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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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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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가까이 법관으로 살면서 부끄러운 사건이 있습니다. 기록을 통해 겪은 ‘살인의 추억’이랄까요.” 지난해 퇴임한 김지형 전 대법관은 22일 고려대 로스쿨 강연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김 전 대법관은 십여 년 전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노파 살인 사건의 1심을 맡았다. 수사 때부터 재판 초기까지 살인을 시인하던 피고인이 재판 도중 갑자기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은 피고인 자백을 녹음한 테이프를 제출했다. 말투가 자연스러워 외압(外壓)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김 전 대법관은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2심에서 무죄로 뒤집혔고 대법원도 그대로 확정했다. 녹음테이프만으론 자백이 자발적이었다고 볼 수 없고 결정적 물증도 없다는 이유였다. 김 전 대법관은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희대의 흉악범이라도 자백이 유일한 증거라면 유죄로 볼 수 없다는 형사재판 원칙에 소홀했던 것이다. “그 피고인이 범인이리란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그 재판에 적용했던 잣대를 다른 일반 사건에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면 채택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백만으로 유죄를 결정하는 게 일반화되면 무고한 전과자를 양산해 정의에 어긋난다는 설명이다.

▷현대 법은 특정 사건에만 통하는 ‘개별적 정의’가 아닌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일반적 정의’에 따른다. 국선변호는 그런 취지의 제도다. 특정 사건만 보면 ‘흉악범을 왜 세금으로 변호해주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반 사건으로 넓혀 보면 변호사 쓸 형편이 안 돼 누명을 쓴 사람을 구제하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주부 살해범 서진환은 25일 재판이 선고 없이 끝나자 국선변호인에게 “왜 자꾸 선고를 미루느냐”며 짜증을 냈지만 그에게도 3심까지 기회를 주는 게 법이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오원춘이 최근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도 일반적 정의에 따른 결과를 보인다. 불우하게 살다 우발적으로 한 범행이었다는 게 판결 요지인데 ‘이 정도 범죄에 사형을 선고하면 사형이 남발될 수 있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그 대신 시신을 358조각으로 훼손한 이 사건의 개별성은 묻혀버렸다. 법 감정과 법 논리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일반인은 “이런 야수를 왜 살려두느냐”고 하지만 법관은 무기징역을 받은 다른 살인범과의 형평을 따진다. 상식과 법의 괴리를 메우기란 그래서 간단치가 않다.

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
#법관#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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