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 명절은 참 이중적이다. 가족이 모여 맛난 음식을 먹으니 좋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 쉼표를 얻는 것도 기쁘다. 하지만 행사치레에 지쳐 드러눕는 주부가 많다. 백수나 주머니 빠듯한 월급쟁이도 부담이 크다. 물가는 또 어찌나 뛰는지. 그런데 말 많고 탈 많은 명절 풍경이 꼭 우리네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10월 31일 서양 명절 핼러윈을 맞은 미국의 씀씀이는 엄청났다. 전미소매업연합회(NRF)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이 ‘뜨거운 밤’을 위해 80억 달러(약 8조7600억 원)를 썼다. 지난해 69억 달러보다 17% 늘어 사상 최고액을 경신했다. 미국답게 애완동물도 축제를 즐겼다. 강아지 분장, 고양이 사탕 등에 3억7000만 달러를 소비해 역시 최고점을 찍었다.
올해 핼러윈 대박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긴 했다. 대선을 치르는 해면 투표를 앞두고 이래저래 돈이 좀 풀렸다. USA투데이는 “올림픽과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히트 등 흥행 호재 요인이 많았던 것도 일조했다”고 분석했다. 안 그래도 파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데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다.
하지만 테이블 아래를 들쳐 보면, 실상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이렇게 소비가 커진 건 여러 악재가 겹친 물가 폭등이 주범이다. 올해 미국이 21세기 최악의 가뭄을 겪는 바람에 ‘핼러윈의 상징’ 호박 값이 가파르게 뛰었다. 중국 경기 둔화와 임금 상승은 ‘메이드 인 차이나’ 파티복과 장식 가격을 올려 놓았다. 어린이 비만 논란이 일면서 비싼 유기농 캔디가 많이 팔린 것도 한몫했다.
사정이 이러니 축제가 드리운 그림자도 짙었다. 델라웨어 주립대 학생신문은 최근 ‘바느질에 빠진’ 신(新) 캠퍼스 풍속도를 조명했다. 턱없이 오른 학비도 버거운 마당에, 괜찮다 싶으면 1000달러씩 하는 파티 의상은 그림의 떡이었을 터. 결국 직접 옷을 지어 조촐하게 명절을 맞는 학생이 많았단 얘기다. 서부 지방지 ‘새크라멘토 비’는 이런 이들을 위해 유행에 뒤지지 않으면서도 저렴한 핼러윈 의상들을 제안했다. 그중 하나는 ‘싸이’ 차림새다. “장롱에 모셔 뒀던 정장을 꺼내 입고 선글라스만 착용하면 당신도 패션 피플”이란다.
이 정도면 웃고 넘기겠지만, 사뭇 진지한 갈등도 있다. 폭스뉴스는 “핼러윈을 금지하는 초등학교가 늘어 부모들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전했다. 빈부 격차가 여실히 드러나는 파티로 가난한 학생들의 맘을 생채기내지 말자는 게 학교 측 논리다. 안 그래도 ‘골칫거리’인 핼러윈을 피해 가고 싶은 속내도 크다. 일부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해골이나 귀신 분장을 악마 숭배라며 비난해 왔다. 서구적 축제에 거부감을 표시하는 이민자 가족들도 있다. 이런 판국에 학생 평등권 추구란 적당한 명분이 생긴 셈이다.
사연이야 제각각이지만 이런 논의들 속엔 ‘앙꼬’가 빠져 있다. 2000여 년 세월이 깃든 핼러윈의 본질은 어린이들의 축제란 점이다. 꼬마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스스로 잔치를 준비하고, 이웃집에 사탕을 조르며 마을 어른께 인사드리는 따사로운 미풍양속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성인들의 논리로 물든 핼러윈을 이젠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할 때”라고 개탄했다. 동심을 멍들게 하는 건 경제니 뭐니 그런 게 아니다. 색안경을 쓴 채 그걸 강요하는 어른들 심보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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